“확장성, 퀄리티, 타이밍, 성공적”, 레진코믹스가 400억 회사가 된 이유
2015년 0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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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손에 쥔 만화 계약서 40장으로 시작했는데, 2년이 안돼 400억 짜리 회사가 됐다. 성숙한 독자들을 위한 만화를 서비스하는 '레진엔터테인먼트(이하 레진)' 이야기다.

작년 한 해 레진의 매출은 100억을 훌쩍 뛰어넘었다. 웹툰으로 100억을 벌었다. 민음사의 재작년 매출이 168억 원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세상의 변화가 철렁 와닿는다. 이제 사람들은 책장에 꽂을 수 없는 디지털 컨텐츠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콘텐츠는 무료로, 수익은 광고로 뽑아내는 게 당연시됐던 국내 실정에서, 레진과 같은 디지털 서커스단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퀄리티, 확장성, 타이밍.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았다.

1. 탄탄한 스토리텔링, 트랜스 미디어 전략 통한 폭넓은 확장성

웹툰을 서비스함에도 불구하고 레진의 사명(社名)이 '레진코믹스'가 아닌 '레진엔터테인먼트'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한희성 대표와 권정혁 CTO가 애초부터 그리고 있었던 그림이 만화 장르를 뛰어넘은 총체적 엔터테인먼트 사업이었던 것.

창업 초기 멤버 중 한 명인 이성업 이사에 따르면 이들이 웹툰으로 시작한 이유는 모바일 환경에서 가장 접근도가 높고, 초기 비용이 적게 드는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화 부문 1위 앱으로서 어느 정도 사용자를 모은 후에 이들은 각 분야별 탑 플레이어들과의 서비스 제휴를 연속해서 만들어냈다.

작년 2월에는 CJ이엔엠과 손을 잡았다. CJ이엔엠은 국내 가장 좋은 시나리오들이 몰려드는 요지다. 수익성의 문제로 작품화되진 못했지만 충분한 작품성을 가진 시나리오들은 레진을 통해 웹툰으로 재탄생된다. 이를 통해 인기를 얻은 웹툰의 경우 다시 영화화될 수 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엔씨소프트로부터 50억 현금 투자를 받았다. 엔씨소프트의 유명 게임인 블레이드앤소울의 외전만화가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는 식이다. tvN과는 드라마 '일리있는 사랑'의 웹툰화를 진행했다. 본방송이 끝나고 10분 이내면 작가가 각색한 웹툰을 만나볼 수 있다. 레진은 이미 제휴 방식을 통해 영화 - 게임 - TV 드라마에 이르는 전방위적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레진의 전략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사한 곳이 미국의 마블코믹스다. 1930년대부터 만화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던 DC코믹스의 대항마로 1960년대 등장한 마블코믹스는 <스파이더맨>, <엑스맨>을 내세우며 '트랜스 미디어 전략'을 구사했다.

같은 음식을 다른 그릇에 옮겨만 담는 것이 원소스멀티유즈(OSMU)라면, 각 그릇의 특색에 맞게 같은 재료로 다른 형태의 음식을 만들어내는게 트랜스 미디어 전략이다. 레진은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마블의 트랜스미디어 전략, 넷플릭스의 클라우드 기술, 스팀의 유료화 정책'을 구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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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코믹스의 인기캐릭터를 모아 영화로 제작해 화제가 됐던 '어벤저스'

트랜스 미디어 전략이 가능한 이유는 100% 탄탄한 스토리텔링 덕분이다. 이른바 작품의 '세계관'이 탄탄하면 드라마,영화,게임 등 다양한 분야로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레진에 단편 에피소드 위주의 작품보다는 긴 호흡의 시리즈물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평행우주론'적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점도 마블과 비슷하다. 있을법한 판타지를 다룬다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DC코믹스의 경우 별나라에서 온 초강력 슈퍼히어로물이 강세를 이뤘다. 상대적으로 마블은 현대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애초부터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염두에 두고 시작됐다는 점, 스토리텔링이 탄탄한 작품을 선호한다는 점, 각 분야 탑 플레이어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한다는 점이 이들 확장성의 비결이다.

2. '작가주의' 시스템 통한 철저한 콘텐츠 퀄리티 관리

일단 컨텐츠가 좋으면, 아무리 박한 소비자라도 지갑을 열게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주의'란 레진 내에 돌고 있는 모든 시스템이 작가 보호와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의미다. 철저한 수질 관리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레진이 투자를 받고나서 가장 먼저한 일은 사무실 이전이나 채용이 아니라 작가 고료를 높여주는 일이었다. 기준은 무조건 국내 대표 포털보다 높은 수준이다. 기존의 잘 나가는 웹툰 작가가 한 달 7천8백만 원 정도의 수입을 거둔다고 하니 연봉으로만 따져도 9억이 넘는다. 때로는 '이렇게 줘도 되나' 생각할만큼, 국내 웹툰계에서는 최고 수준의 고료를 작가에게 제공한다. 대표의 철학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한희성 대표는 퀄리티 있는 콘텐츠가 나오기 위해서는 작가의 재정 상태가 안정적이어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좋은 작품이 나오길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작품의 연재 일정도 작가가 직접 정한다. 작품성만 높일 수 있다면 월 1회 연재도 가능하다. 주당 1,2회 연재 스케쥴이 벅차 가끔 연재 중단을 선언하는 작가들이 적지않은 웹툰계에 이례적인 행보다.

만화 출판사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편집자들을 고용한 것도 전략적인 접근이다. 기존 관례에 비해 레진의 편집자는 더욱 깊숙히 작품 생산에 관여한다. 독자들이 선호하면서도 작품성을 놓치지않는 방향으로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물론 이는 편집자 개인의 기호가 아닌 철저한 데이터 분석에 기반한다.

실제 일본의 경우 만화 편집자의 권위는 작가만큼이나 높다. 유명 저자인 츠네미 요헤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중대형 출판사에서 상업출판으로 나오는 책과, 개인이 아마존 등에서 출판사의 편집자를 통하지 않고 낸 전자책, 블로그 글은 전혀 다른 물건, 전혀 다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같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출판사의 책에는 프로 편집자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쓴 것은 혼자만 좋아하는 내용이 되기 쉽다.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 사고 싶어하는 내용인지는 저자 혼자서 알 수가 없다.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역할이 출판사와 편집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성업 이사에 따르면 향후 레진의 목표는 스포츠, 로맨스 등 각 만화 장르별 전문 편집자를 세우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작가가 좋은 만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콘텐츠 생산자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은 플랫폼 사업자에게 있어 가장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접근 방식이다. 세계적인 숙박 공유 서비스인 '에어비앤비'의 경우도 많은 정책이 집을 제공하는 호스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 에어비앤비는 예약 후 나타나지 않는 게스트에 대해 바로 비용을 물어줌은 물론, 객실 파손에 대해 최대 10억 원까지의 보상금을 지원한다. 또 신청만 하면 전문 사진가가 방문해 무료로 사진 촬영을 해주기도 해 호스트들의 호응을 얻었다. 에어비앤비 내에서 가동되고 있는 호스트 보호 프로그램의 수만 40개에 이를 정도다.

3. 비즈니스에도 중요한 건 타이밍, 정부 정책 기조와의 적합성

최근 중국 시장 진출이나 핀테크 규제 문제를 겪으며,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정부와도 합이 맞아야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결국 법적으로 막히게 되면 어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해당 국가 내에서는 시도가 불가능하다. 반면 흐름을 잘 타 승승장구하는 기업도 있다.

레진은 처음부터 정부가 애정을 쏟아부은 쪽이다. 웹툰 작가와 같은 1인 창작자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전폭적인 지원의 이유였다. 창조경제 정책 기조의 핵심인 일자리 창출과 신기술 개발에 잘 부합하는 사업 모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업 초기, 미래창조과학부, NIPA 등 정부 기관으로부터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분명 운도 한 몫 했다.

한 정부기관은 '레진코믹스와 같은 모델을 만들자'는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높은 애정과 관심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마무리로 레진은 2014년 인터넷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정부 지원을 졸업했다.

레진,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될까?

내실있는 성장세를 보여왔던 레진은 중국, 일본 진출도 준비 중에 있다. 몇일 전 레진은 전 세계 아마추어 작가들을 대상으로하는 '국제만화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일본에서는 600여편, 중국에서는 100여편이 접수됐다. 적지 않은 수다. 작년 10월에는 텐센트의 큐큐닷컴과, 중국 유명 게임 사이트 유요치에 웹툰 연재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일본 진출을 가장 우선으로 두고 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만화 종주국이기도 하고, 유료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도 적기 때문이다.

전방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야한 망가 플랫폼'이라는 대중의 고정관념은 득일까, 실일까.

이성업 이사는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성인물이 많긴 하지만 포르노그래피는 거의 없다. 흐름 상 부분적으로 수위 높은 러브씬이 등장할 뿐이다. 엄격한 자율 규제도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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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코믹스 1주는 기념 분석 데이터, 작년 6월 발표

2014년 중반에 레진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최고수익-최고조회수 웹툰은 모두 19금 로맨스 물이다. 애초에 '성인들을 위한 웹툰'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나왔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포갓레인저(액션 판타지), 히어로왈츠(판타지 로맨스)등과 같은 다른 장르의 콘텐츠도 인기를 얻고 있다.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위해서는 성인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이성업 이사는 '청소년의 전유물이었던 웹툰을, 깊은 취재와 높은 퀄리티 관리를 통해 성인을 넘어선 모두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의견을 밝혔다.

아니면 아예 반대로 '성인물은 저급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시는 멋지고 기가막힌 성인 전문 엔터테인먼트사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만큼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도 높다. 어느 쪽이든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하다.

매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수익이 적다는 것도 약점으로 지적된다. 높은 작가 고료 때문일 것이다. 대표의 철학 덕에 작가 고료를 낮추는 일은 없을 것 같고, 향후 확장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한국에도 마블사와 같은 정말 괜찮은 엔터테인먼트사가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레진은 아직 과정 중에 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기업이 겪고 있는 거품 논란은 거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면서 자체적인 수익을, 그것도 연간 100억이 넘게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부터가 기업의 자생력과 내공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성장세를 바라보고 있어도 불안불안하지 않은 이런 기업이 더 많아지기를, 정부 못지 않게 개인적으로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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