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생긴 일 #2] 12개월 동안 12개 스타트업,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를 만든 피터 레벨을 만나다
2014년 10월 24일

방콕의 대표적인 협업 공간 허바(지난 기사: [방콕에서 생긴 일 #1] 태국 스타트업 커뮤니티의 시초, 허바를 만나다)에서의 마지막 주에 있었던 일이다.

허바의 경우 1층은 자유롭게 열린 핫데스크로, 2층은 단독 사무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37코인스는 이 공간을 한 달간 빌려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더니, 아래층에 행사가 있어 오늘따라 소란스럽다며 옆 자리에서 일을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흔쾌히 수락한 후 각자 일을 하다 흘낏 옆 자리를 보자, 매우 낯익은 웹사이트가 상대방의 모니터에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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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리스트(Nomad List)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여행하며 영감을 얻는 디지털 노마드들을 위한 서비스이다. 이들에게 걸맞는 각 도시의 리스트와 지역별 생활비, 기후 그리고 인터넷 속도 등 각종 필수 정보를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나 역시 아름다운 자연과 고유의 문화, 맛있는 음식과 저렴한 생활비가 어우러진 곳을 옮겨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이전에 트위터에서 발견하자마자 즐겨찾기에 담아둔 곳이었다. 정말 멋진 서비스인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상대방이 대답했다.

"고마워. 내가 여기 운영자야."

잠시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했다. 다른 팀원들은 어딨냐고 물었더니 혼자서 기획, 디자인, 코딩까지 다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문득 이전에 읽었던 기사 하나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12개월 동안 12개의 스타트업을 만들고 있는, 언뜻 들으면 황당할 수도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네덜란드 출신 모험가, 피터 레벨(Pieter Levels)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관련기사]
더넥스트웹(The Next Web): This website is a guide to the best cities for digital nomads and perpetual travelers
테크인아시아(Tech in Asia): 12 startups in 12 months: here’s how this digital nomad is f**king do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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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떠오르는 각종 아이디어들을 여러 차례 서비스로 구현해 보았지만 단 한 차례도 프로젝트를 끝까지 마쳐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자신이 만족할 정도의 수준까지 서비스를 개발하고 난 다음에는 아무도 그 서비스를 필요로 하지 않은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마케팅이나 투자 유치는 잠시 내려두고, 서비스 개발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해서 신속하게 서비스를 만들고 사용자가 얼마나 모이는지, 수익은 어떻게 나오는지를 실험하고 싶었다는 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

이제까지 진행한 여섯 개의 서비스 중 피터 본인이 생각하기에 의미가 있고, 실제로 수익을 내고 있는 서비스로 꼽은 것은 고퍼킹두잇, 기프트북, 그리고 노마드 리스트이다.

고퍼킹두잇(Go Fucking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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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퍼킹두잇의 이용방법은 간단하다. 사용자는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와 지인들의 이메일, 그리고 목표일을 등록한다. 목표 일에 지인들에게 이메일이 발송되어 사용자가 목표를 이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게 되고, 목표 달성에 실패했을 경우 사용자가 미리 설정해둔 요금이 사용자의 신용카드로 부과된다.

기프트북(Gift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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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북은 사용자가 업로드한 gif파일을 실제 종이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북으로 만들어 보내주는 서비스이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공급업자를 찾고 단가를 인하하기까지의 지난했던 과정을 들려주며 온라인 서비스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물품을 제작하고 공급하는 원리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이야기했다. 덕분에 이제 고객들은 기프트북을 전 세계 어디서나 무료로 배송받을 수 있다.

노마드리스트(Nomad List) / 노마드잡스(Nomad J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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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금까지 해온 프로젝트들 중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많은 주목과 사랑을 받고 있는 서비스이다. 원격으로 일을 하며 살기에 가장 최적의 도시들을 뽑아 관련 정보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최근 서비스를 시작한 노마드잡스(Nomad Jobs)에서는 일자리까지 찾아볼 수 있다(안타깝게도 개발자를 찾는 글이 대부분인 걸로 봐선, 아직 디지털 노마드로의 길은 개발자쪽을 향해 더 활짝 열려있는 듯하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해야 한다고? 왜?

네덜란드에서 판다믹스쇼(Panda Mix Show)라는 인기 유투브 음악 채널을 운영하던 그는, 사실 네덜란드에 계속 머물렀다면 부족한 것 없이 지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의 크고 높은 빌딩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며 파티와 콘서트장을 오가고 뮤지션들과 어울리는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나는 그가 왜 이를 박차고 뛰쳐나왔는지가 궁금했다.

"갈수록 유투브나 구글같은 거대 플랫폼에 의지해서 수익을 얻는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유투브의 경우 한달에 150만이 넘는 방문자가 몰려들어도 막상 운영자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몇백 달러 정도다. 다른 무언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그땐 정말이지 삶이 지루했다. 일을 하고, 주말이면 나가서 술을 마시고, 내 일상은 건강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이렇게 무미건조한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라면 내 인생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뀔 것이 없어 보였고, 이 사실은 날 절망하게 만들었다. "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의 집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둘 처분하기 시작했다. 옷장을 싹 비우고, 가구들을 치웠으며, 마침내 그의 방에 남은 것이 매트리스, 책상, 그리고 맥북뿐이었을 때 그는 암스테르담의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올해 3월부터 지금까지 그가 12개월 12개 스타트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지낸 곳은 태국의 방콕과 치앙마이, 인도네시아의 발리, 필리핀, 대만, 일본 등이다. 각지에서 자신과 같은 디지털 노마드들을 만나며 그는 바로 이것이 미래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살아가는 방식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 아이디어로부터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어준 노마드 리스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5년, 10년 후에는 우리가 이름을 익히 아는 기업들도 사람을 고용한 후에 '이제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하시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해질 것이라고 믿는 그는, 왜 우리 모두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막히는 길에서 차를 몰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개인의 행복 차원에서도 그리고 물리적인 사무실에 자원을 투입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도 전세계에 사람들이 퍼져서 일을 하는 게 이득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자리를 위해 죄다 서울로 몰려들어 마침내 전체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 지역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정상적인’ 삶 보다 ‘행복한’ 삶

그는 2009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한국 사회에는 소위 정상적인 삶이라고 불리는 모범 답안이 확립되어 있고, 모두가 이를 이루기 위해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시간을 쏟고 있다는 것이 그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 대한 감상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한국 경제에 대해 공부를 하고, 많은 한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이들이 소위 '정상적인' 삶을 위해 '행복한' 삶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또는 졸업 전에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을 구하지 못하면 흡사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대안을 찾을 때라고 본다. 사회가 설정한 모범 기준을 염두에 두고 그에 맞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새로운 대안을 찾는데 생산적으로 사용할 때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이제 우리는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흐름이다. 전통적인 방식이 언제나 옳고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듯, 사람들로 가득 찬 전철이나 매연과 소음이 뒤섞인 혼잡한 도로를 차로 뚫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일을 하는 게 더 이상 필수적인 건 아니란 이야기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여행을 하면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삶보다는 분명 힘들 수도 있지만, 한 가지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의 삶이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 말이다."

디지털 노마드들의 출현으로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고, 그것이 바로 아주 가까운 미래라고 믿는 그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된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그 때가 어서 다가오길 바라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서(필자 블로그: 디지털 노마드,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자유를 허하라), 앞으로의 그의 행보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12개월 12개 스타트업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은 그의 개인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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