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스타트업의 죽음은 폐업이겠죠. 폐업을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좌충우돌 깨지며 간절히 일궈온 모든 일이, 그 대책 없이 빛나는 시간을 함께한 팀원들의 헌신이며 마음들이 소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뒷목이 서늘합니다.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덩케르크>(Dunkirk, 2017)는 생존에 관한 영화입니다. 정확히는 '인간을 구원하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을 잃었을 때 우리가 맞닥뜨릴 가장 큰 재난은 전쟁이겠습니다. 그 어리석은 재난 안에서 영화 속 인물들이 생존할 수 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리려는 조건 없는 노력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은 다른 인간뿐이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입니다. 턱밑까지 올라온 독일군에 의해 연합군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지역에 고립됐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바다 건너로 보이는 저 영국 땅으로 탈출하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앞다퉈 구축함에 오르고, 끝내 밀려난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러나 구축함도 얼마 가지 못하고 어뢰에 침몰당합니다. 해안에서 탈출하고자 사투를 벌였던 사람들은 발이 닿지 않는 바다에 떠서 이제 다시 그 해안으로 돌아가는 일이 간절해집니다.
전쟁은 편 가르기의 끝이죠. 인간이 만든 인간의 재난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또 편을 가릅니다. 지겹고 피곤한 일이죠.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일이라 믿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군가 구축함의 입구를 지키며 "잉글리쉬 온리"를 외칩니다. 영국군 사이에서도 "여기는 수류탄 병사들이 서는 줄"이라며 누군가를 밀쳐내죠. 민간인 어선에 숨어 함께 생존을 도모하던 동료들도, 생존위협에 몰리자 "저 자는 스파이가 분명하다"며 밖으로 몰아내려 합니다. 겨우겨우 탈출에 성공한 후에도 육군은 "너넨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었냐"며 공군을 비난하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이 편 가르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거꾸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살리려 듭니다. 민간인 어선에서 스파이로 내몰린 그 군인은 마지막까지 배의 구멍을 틀어막으며 사람들을 살리고 자신은 물속에 잠깁니다.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는 집으로 돌아갈 연료까지 마저 태우며 사람들을 구하고서 묵묵히 적진에 착륙합니다. '너넨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었냐'는 말을 들은 공군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자네가 어디 있었는지 내가 알고 있네.
스타트업의 하루는 치열합니다. 그래서 전쟁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생존' '실탄' '표적' '전우'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죠. <덩케르크>의 생존 이야기는 우리를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아군 적군 편 가르기를 했다면 군인들은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애초 구출 계획 인원의 10배가 넘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건 편 가르기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편 가르기에 가담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시야가 넓고 깊었을 뿐입니다. 이들의 편 가르기 기준은 '나의 공동체인가 아닌가'였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의식, 결국 내 동료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스타트업의 전쟁통 같은 날들의 틈에도 재난은 복병처럼 숨어있습니다. 그 재난의 연속에서 우리가 생존할 방도는 동료 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그냥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공동체 의식을 가진다는 것. 동료의식이 있다는 것. 사실은 이게 얼마나 강력한 힘인가 합니다. 편을 가르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정치질, 라인질로 피곤해집니다. 분열되는 수만큼 힘도 빠집니다. 스타트업이 작지만 강한 이유는 현명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봅니다. 서로의 구원은 서로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로서의 스타트업’은 이 치열한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전략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영화 이미지 ⓒ Warner Br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