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DER-MAN 2, Sam Raimi, Tobey Maguire, Kirsten Dunst, 2004, (c) Columbia
*예고편 수준의 몇몇 작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볍습니다. 한층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겁나 재밌습니다. 그놈의 '큰 책임'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재밌는 오락영화가 나왔습니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사실 샘 레이미 감독은 얼마나 짓궂었던가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인간극장 - 피터 파커씨의 거미줄 인생'에 가까웠습니다. 아니 할머니랑 대출받으러 은행에 가는 히어로가 어딨습니까(심지어 대출도 거절당합니다). 삼촌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그래서 매일 저녁 할머니 얼굴을 보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속내를 터놓을 친구도 하나 없었습니다. 게다가 찢어지게 가난하기까지 해서 피자 배달을 해야 했죠.(이마저도 짤렸습니다)
스파이더맨을 되찾은 마블은 그간 피터 파커를 짓누르던 요소들을 다 지웠습니다. 겨우 고등학생한테 책임을 강요하지도, 삼촌의 비극적인 죽음에 시간을 할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셔야 할 할머니를 대신 알아서 잘 살 것 같은 젊은 미녀 숙모를 배치했습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나아가 도움까지 구할 수 있는 친구 네드를 스파이더맨 곁에 두었습니다. 가정 형편 역시 그리 가난하지 않죠.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피터 파커는 마침내 살만합니다. 그냥 똥꼬발랄한 고등학생 히어로입니다.
이 신입 히어로의 고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얼른 제발 빨리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의욕에 가득 차서 어쩔 줄을 모르죠. "아직 이르다"는 선배 히어로의 조언은 그저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 뿐입니다. 아니 대체 왜 이렇게 몰라주는 걸까. 나도 중요한 일을 맡으면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 나는 이미 영웅이 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데!
얼른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은 신입 히어로를 오만하게 만듭니다. 피터는 토니(아이언맨)가 만들어준 슈트를 해킹해 '왕초보 모드'를 건너뛰죠. 스파이더맨은 그에게 필요한 초반 과정들을 생략해버립니다. '이 정도는 나도 이미 안다'고 여기며 무시합니다. 결국, 사달이 납니다. 의욕만 가지고 나서다가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선배 토니는 뒷수습한 후에 후배를 따끔하게 나무랍니다. 자신이 선물한 슈트를 다시 빼앗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안 돼요! 전 이 슈트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피터)
"슈트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더더욱 슈트를 가져선 안 돼. 알겠어… 젠장 우리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네" (토니)
토니의 이 말은 경험에서 나온 진심 어린 조언이었습니다. <아이언맨3>에서 토니는 슈트에 대한 집착을 벗고 '슈트의 창조주(mechanic)'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았었죠. 그때의 교훈으로 '도구나 인프라가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중요한 건 그걸 활용할 사람의 역량과 마음가짐'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탄탄히 기본기를 쌓지 않고 당장 편한 도구들에 의존하다 보면 금방 한계가 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슈트를 빼앗은 이유는 후배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겠습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피터 파커처럼, 현실에서도 신입사원들은 의욕이 다소 넘치곤 합니다. 얼른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하루빨리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과정을 건너뛰려는 오만을 부리기도 합니다. 작은 일들은 변변치 않게 여기고, 크고 멋있어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 하죠. 영화 속의 피터 파커처럼요.
그러나 작은 일은 무시할만한 게 절대 아닙니다. 작은 일은 큰일과 동등하게 중요합니다. 큰일은 작은 일들의 징검다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또 작은 일을 하며 차근차근 기본기를 쌓는 초반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때 배우는 그 '기본기'라 불리는 것들은 사실 끝까지 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고, 그러므로 처음에 배웁니다. 신입 때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며, 그러므로 신입 때 배우는 게 가장 효율적인 것들입니다. '작은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스파이더맨은 토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실은 조금 더 땅에 붙어 있어 보려고 해요. 사람들에겐 아직...'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필요할 것 같거든요."
아무리 기웃거려봤자 결국 정석만 한 지름길은 없는 것 같네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라면 당장 주어진 작은 일부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스파이더맨처럼 엄청난 능력을 갖춘 히어로가 될 재목이라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들떠서 의욕만으로 붕붕 떠다니지 말고, 땅에 붙어서 내 일을 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고 가치가 낮은 일이 아니니까요. 그럼, 캡틴 아메리카 선배의 교육 비디오를 시청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안녕 친구들. 캡틴 아메리카야. 신입사원이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이 있지. 바로 인내심이야. (찡긋)
영화 이미지 ⓒ Sony Pic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