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학을 다녔던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과 또 현재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2014 년의 캠퍼스를 비교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아마도 화장실 풍경일 것이다.
필자와 비슷한, 그러니까 90 대 후반 학번들은 익숙한 풍경일 화장실 문에 빼곡히 적혀있던 낙서를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여자 화장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화여자대학교로 기억하는데, 사회학과 교수님 한 분께서 이 현상이 너무 재미있다고 느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작된 연구의 결과 이 교수님께서는 화장실 풍경이 이렇게 변화한 것이 바로 스마트폰 때문임을 발견하였다. 과거에 우리가 화장실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풍경은 문짝이었지만,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진 오늘날 우리는 그 작은 화면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세계로의 연결채널’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 덕택에 우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3 분에서 5 분 남짓의 시간조차도 그 이름 그대로 ‘스마트’하게 보내게 되었으며, 낙서하는 것과 같이 ‘덜 스마트’한 짓은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획득하는 정보의 양은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만 하더라도 바로 옆에서 책을 보고 있는 필자의 지인은 필요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검색하고 있고, 그것이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닌 것을 보면 분명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스마트’함의 가치(Value)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술은 정보(Intelligence)를 가장 효과적으로 분배하여 주는 수단이다. 어떤 글에서인가 필자가 ‘기술은 태생적으로 민주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과거에는 비대칭적으로 존재했던 것들이 기술을 통해 만인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는 것이다. 너무도 훌륭한 예가 바로 구글(Google)이다. 구글을 통해 우리는 불과 10 년 전만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만이 독점했던 정보들을 너무도 쉽고 너무도 당연하게 획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와 같은 민주적 기술의 선봉에 서있는 구글의 에릭 슈미츠(Eric Schmidt) CEO가,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이와 같은 정보획득의 용이성이 오히려 프라이버시(Privacy)의 실종과 더불어 기술의 가장 큰 폐해(Downside)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술의 발달이 빠른 의사결정 등을 가능케 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지혜의 형성(Wisdom Built)과는 다른 것이라 지적한다.
지혜는 없고 정보만 있는 세상은, 이성은 없고 감성만 있는 세상만큼이나 불행할 것이다.
얼마 전 SNS, 특히 페이스북으로부터의 사용자 이탈 현상이 사회의 주목을 끌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더 이상은 그 이름조차 언급하기 싫은 그 해상 사고로 온 나라가 비통해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이전에도 SNS는 온갖 ‘정보’들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객관적이던 편향된 것이던 관계 없이 SNS의 사용자들은 온갖 정보들을 나열하고 또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처럼 ‘정보’들 만으로 가득 차버린 SNS는 역설적으로 더 이상 ‘스마트’하지 못한 곳이 되어버렸고 이에 피로감을 느낀, 심지어 불행을 느낀 적지 않은 수의 사용자들은 이제 그 공간을 등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공간을 떠나지는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스마트하나 지혜롭지는 못할 때 세상은 그런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시 슈미츠의 말을 빌려보자. 그는 지혜가 “진실의 추구에 대한 헌신(Commitment to getting to truth)”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Human systems)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미디어와 많은 수의 보통 사람들을 이를 단순화하여 생각하려 노력한다. 나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있지?’,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것의 배후에는 어떤 이유가 숨어있는 것일까?’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나는 여러분들에게도, 그것이 나를 비롯한 누구로부터 들려오는 것이든, 여러분들이 듣게 되는 것들을 그대로 한 번에 믿지 말고, 스스로 확인해 보길 권하고 싶다. 호기심과 스스로의 탐구를 통해 여러분들은 자신만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통해 인간으로서 보다 나은 존재(A better human-being)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미디어와 개인 간 교류가 제공하는 정보들은 세상을 파편적으로 단순화 한 것이며, 동시에 수동적으로 ‘소비(Consumed)’되는 것이다. 반면 그를 확인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연결 및 교차시키며 ‘사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지혜는 그와 같은 깊은 ‘사고’의 과정에서, 그리고 또 그 결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구성해 온 가장 근본적 원리 중 하나는 ‘희소성의 원칙’이다. 결국 희소한 것이 더욱 큰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그것이며, 이는 과거의 노동집약과 자본 및 기술집약사회를 거쳐 오늘날의 지식집약사회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제 모두의 손에 세상으로 통하는 효과적인 통로가 쥐어져 있고, 더 이상 비대칭적 정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스마트’한 세상에서 이제 우리는 모두가 누리는 ‘스마트’함이, 또 그것이 만인에게 제공하는 무제한의 정보가 가지는 가치가 역설적으로 감소하게 됨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개인의 삶에서나 비즈니스에서나, 혹시 당신은 아직도 이처럼 그 가치가 보편적인 것으로 변해만 가는 정보를 얻고 혹은 제공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희소성의 원칙은 결국 우리에게 독창적인 가치를 만들어내야 함을 주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가 보편적인 오늘날의 스마트한 세상에서 독창적인 가치와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는 오히려 그들 정보들의 연결 및 교차 위에서 형성된 지혜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스마트폰을 사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몇 년 전 한 지인의 질문에, “심심할 새가 없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고를 위해, 지혜를 위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줄 수 있는 독창적이고 희소한 가치를 위해 오히려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과 SNS로 대변되는 정보의 채널에서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때때로 조금은 심심함을 느껴볼 필요도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자.
지난 몇 달 동안 필자는 탈퇴까지는 아니지만 페이스북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요즘 ‘페이스북이 없는 삶’이 어떠냐는 지인들에 질문에 필자는, “너무 좋아. 하루에 한 시간 정도가 생겨!”라고 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보의 수동적 소모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게 된 그 한 시간의 시간이 여러 가지를 사고해 보는 데에 너무도 소중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그대,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가 기억이 난다.
정보의 세상에서 지혜의 가치를 위해, 한 걸음 떨어져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조금은 민망할지라도, 오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지혜를 원하는 그대,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