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전산이야기(출판사 : 쌤앤파커스, 77p)의 '쉬운 것만 찾는 놈은 성공할 수 없다.'라는 챕터를 옮겼다.
'나가모리 시게노부'는 참으로 불도저같은 사람이다.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면 두 배로 일해서 같은 성과를 내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가 창업이후 지금까지 일본전산 전 사원에게 말해온 사훈은 "즉시하고(Do it now). 반드시 해내고(Do it without fail), 될 때까지 한다(Do it until completed)"세 가지이다.
쉬운 것만 찾는 놈은 성공할 수 없다.
일본전산이 처음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제대로 된 수주를 따냈을 때의 일이다. 그 과정이 참 흥미롭다. 1973년 10월, 중동 전쟁이 발발하면서 산유국들은 생산을 축소하고 가격을 올렸다. 1974년부터는 원유 가격을 두 배로 올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유가 상승이 경제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고,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각국은 앞다투어 에너지 절감 운동을 펼쳤다.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도 1974년 소비자 물가지수가 20% 이상 올랐을 정도로, 시장이 일대 충격에 휩싸였고 곧바로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일본이 창업한 시기는 이런 경제적 위기의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기업 대상 영업을 시작했을 무렵이 바로, 소위 ‘오일쇼크’의 시장 침체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일쇼크를 하나의 기회로 보았다. 각 기업들이 에너지 효율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을 포착한 것이다.
어차피 기존 경쟁사와 정면 대결은 힘드니, 어렵고 까다로운 기술 개발 쪽으로 승부하자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모터 전문 기업들 대부분이 에너지 효율을 높인 ‘신제품 개발’보다는, ‘긴축과 매출 유지’ 쪽으로 관심을 기울일 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에너지 효율을 낮춘 모터에 대한 아이디어가 충만하다 해도, 실적도 변변치 않은 회사 직원이 대기업 담당자를 만나 영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상대방이 먼저 연락해줄 리는 만무했다. 연락처를 남겨도 회신이 없었다. 방법은 더 많이 찾아가고 더 끈질기게 담당자에게 접근하는 일뿐이었다. 어렵사리 담당자를 만나도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이미 우리가 거래하고 있는 모터 회사만 열다섯 개가 넘는다. 이제 와서 포터를 팔겠다고 찾아온들 도와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거래처를 줄이려고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모터 이야기라니 가당치도 않다.”
쟁쟁한 기업들이 즐비한데 아무 검증도 되지 않은 기업체에게 ‘알았소, 믿고 맡겨보겠소.’하고 일을 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일본전산이 내세운 것은 ‘기존 거래처들이 못하겠다는 것, 어려운 것만 달라’는 조건이었다.
나가모리 사장은 ‘거래하는 회사가 많아 부담된다’며 외면하려 하는 대기업 담당자에게 ‘요즘 고민거리가 뭐냐?’고 되물었다. ‘현장 돌아가는 실태라도 파악하고 싶어 여쭤본다’며 ‘고민거리를 풀어주겠다’고 친해지려 애썼다. 또, 다른 하청업체에서 못하겠다고 하는 일이나 개발 부서에서 진행은 하고 있지만 진척이 없는 ‘고민거리’를 달라고 졸랐다.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나가모리 사장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의 믿음이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쉬운 일감만 찾아 회사를 키울 순 없다. 우리가 크려면 어려운 일을 하는 게 수순이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나가모리 사장의 모습을 보고, 드디어 담당자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도움을 줄 수 없지만, 어떻게든 거래를 해보고 싶다면 우선 회사 소개 자료를 한번 가져와바라, 처음부터 바로 거래를 트기는 어렵다. 더욱이 대량 발주는 기대하지 마라.”
회사 소개 자료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딱히 서면으로 기록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1973년 7월 창립’, 그것밖에는 약력이나 특이 사항에 적을 내용이 없었다. ‘나가모리 시게노무 사장, 나이 28세’…., 하는 식으로 직원들의 이름과 나이를 적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자료를 내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담당자가 “어이고, 사장님이 우리 아들 뻘이네.”하고 농을 던질 정도였다.
며칠 간격으로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러자 결국 담당자는 개발 부서의 직원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언질을 주었다. “그렇게 자신 있고 꼭 뭔가 해보고 싶다면, 우리 회사 연구소로 직접 찾아가보라. 거기 가보면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담당자들이 밤늦도록 실험과 연구를 거듭하고 있을 테니, 그 중에서 몇 가지 일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침 기업 연구소에도 ‘에너지 절약’을 위한 제품 개발에 한창이었다. ‘가볍게, 작게, 얇게’라는 슬로건 하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 전력의 50% 이상을 모터가 소비하고 있으니, 모터의 진화는 ‘에너지 절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에너지 절약에 적합한 제품을 만들려면 슬림하고 효율 높은 모터가 필수였다. 나가모리 사장은 연구소 담당자를 찾아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미 소개를 받았는지 담당자는 처음부터 고민을 털어놓으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 모터의 크기를 반으로 줄여달라. 석 달 안에 반으로 줄일 수 있다면,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겠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나가모리 사장은 대뜸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긴 스물여덟의 젊은, 거기에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었으니, 쇠라도 씹어 먹으라면 그러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모르니 쉬워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일을 찾아야 할 시기였기 때문에, 우선 ‘가능하다’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이거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반으로 줄이면 된단 말씀이죠? 한번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가모리 사장은 그때의 상황을 추억한다. 겁 없는 이십대였기 때문에,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이후 일본전산의 ‘정신’을 공고히 해준 ‘섣부른 대답’이었다고,
‘세상에 없는 것,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일’이 주는 매력은 묘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딱 부르지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돌아가서 연구해보면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같이 뛰어든 창업 멤버 세 명 모두 ‘물고 늘어지는 것에는 자신 있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맞대면 어떤 문제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직원들이 “이런 힘든 일을 왜 가져오느냐? 사서 고생하는 일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많다.”하고 불평불만을 퍼붓고 행동을 함게 해주지 않았다면, 사장인 그도 그렇게 배포 있는 영업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전산은 처음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일을 의뢰받았다. 이 첫 연구에 3개월 동안 전 직원이 매달렸다. 밤낮을 안 가리고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여간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말이 ‘크기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지 몇 달 안에 해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연구해도 진척이 없으니, 어떤 날은 만들어진 모터를 망치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보기도 했다. ‘더 가볍고 작고 얇게 만들어야 하니, 두들기면 조금이라도 작아질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물론 모터를 망치로 두들긴다고 가벼워지거나 얇아지는 건 아니니, 속 시원히 스트레스라도 풀 심산이었다.
아무튼 여러 방법을 다 동원해도 기존 제품보다 반 정도의 크기로 줄이기는 힘들었다. 대신 15% 정도 줄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처음 약속한 반으로 줄이려면 아직 멀었다.
나가모리 사장은 계속 시간 투자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기업 연구소 직원들도 자신들이 풀기 어려운 숙제라서 ‘시험 삼아 속는 셈치고 맡겨보자’는 심산으로 맡긴 것이다. ‘잘하면 좋고,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마음속으로 ‘남들이 다 포기한 것이니 꼭 해내고 싶다’는 오기가 더 강해졌다.
하지만 열일을 제쳐두고 한 가지 프로젝트에 전원이 매달리다 보니, 회사 운영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충 끼니 때우고 일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무엇보다 몸이 축나게 생겼다. 한 직원이 “이대로 가면 자본금도 다 까먹겠다, 담당자에게 못하겠다고 하자.”하고 제안을 해왔다.
며칠 동안 직원들과 의견을 모은 결과, ‘여기까지맊에 못하겠다’고 보고하고, 약속을 못 지킨 것을 사과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절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지만, 일단 총대는 나가모리 사장이 메기로 했다.
다음 날 나가모리 사장은 대기업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무실로 채 들어가기도 전에 복도에서 담당자와 마주쳤다. 그는 나가모리 사장을 먼저 알아보고, 대뜸 말을 꺼냈다.
“나가모리 사장, 웬일인가? 일전에 부탁한 것, 못하겠다고 찾아온 것 아니야? 그래, 잘 생각했어. 어차피 자네들도 해내기는 어렵다고 봤네. 사실 규모가 있는 다른 회사 예닐곱 군데에도 부탁했었는데 다들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어. 자네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지? 지금까지 고생했네. 다른 일거리가 있는지 찾아보게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가모리 사장은 마음을 바꿨다.
“과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중간에 포기할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오늘은 그저 납기도 가까워졌고 해서, 중간 보고를 하려고 왔습니다. 지금까지 별 문제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기업들도 못한다고 손을 뗀 개발인데, 설비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네들이 가능하겠는가? 고작 신출내기 네 명이 모였다는데, 기대도 안 한다.’ 하는 표정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나가모리 사장은 그곳 복도에서 ‘다른 곳에 들렀다 시간이 잠시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고는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들 기뻐해. 경쟁사들이 다들 손을 털고 나가떨어졌다. 이제 우리만 남았다. 어차피 승산은 더 높아졌다. 최대한 에너지 절약형으로 만들어내면 가능성이 있다. 아직 15일 정도 남았으니 한 번 끝까지 해보자. 할 수 있어!”
나가모리 사장은 이렇게 격려 아닌 격려를 한 후, 다시 직원들과 실험에 몰입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물고 늘어지는 만큼 결과가 나온다. 어차피 우리만 만들 수 있는 제품이다.’ 이런 생각으로 연구에 몰두한 것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렇고 그런 하청업체로 전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연구하던 것과, ‘이것만 성공시키면 대기업과 거래할 수 있다’고 기대에 차서 연구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 거래에 대한 기대감에 다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역시나 결과는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 주어진 기간 내내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을 투자하면서 몰입했지만, 처음 약속한 절반 수준으로 ‘가볍게, 작게, 얇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기간 내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18%정도 ‘가볍게, 작게, 얇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더 중요한 수확은 앞으로 ‘실험을 거듭하면’ 더 가볍고 작게 만들 수 있다는 ‘검증’을 했다는 것이었다.
주어진 기간 동안 노력했지만, 최종 목표치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아까워 상황 보고라도 제대로 하기로 했다. 일단 목표는 달성을 못한 것을 사과해야 했다. 처음 호언장담했던 ‘50% 축소’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가모리 사장은 담당자에게 경과 보고를 하고 시제품과 자료를 건넸다.
하루가 지났을까? 작업을 의뢰한 대기업에서 내사하라는 연락이 왔다. 담당자는 ‘설마 크기를 줄일 수 있을까 기대도 안했는데, 3개월 만에 18% 축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애초부터 반으로 줄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의뢰를 했고, 그나마도 일본전산만이 최후까지 남아 기록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발주를 받았다. 이것이 일본전산이 대기업과 이룬 첫 거래였다. 시제품 연구에 동참했던 기업들 대부분이 이미 잘 알려진 규모 있는 회사들이었기에, 그들을 물리치고 주문을 받았다는 것 자체로 대단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일본전산 조직 전체에 엄청난 자신감을 불어넣는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불가능이라는 것은 핑계’라는 문화가 자리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