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척 왜적에 맞선 이순신의 한 줄기 일자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와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륙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작은 나라가 어떻게 자신을 지켜올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정갈한 대답입니다. 강자의 거드름 앞에서 약자가 보여줄 수 있는 위엄에 대한 은유입니다.
<명량>, 「칼의 노래」, ‘불멸의 이순신’ 등 이순신 장군을 다룬 작품은 다 잘 됐죠. 국운을 건 절체절명의 전투라는 소재의 힘도 있겠지만, 그보다 장군이 「난중일기」라는 깊이 있는 기록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수준 높은 창작물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의 글쓰기는 이순신이라는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일자진과 같이 간결히 말했습니다. 문장들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난중일기의 투박한 문장들은 이상하게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팀원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다가 개발언어도 결국 우리들의 말과 같은 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작은 팀이지만 우리 개발자들은 저마다 코딩 스타일이 다른데요, ‘개자이너(개발자·디자이너)’인 이화랑 대표는 디자이너 출신답게 코딩을 할 때도 깔끔함이 없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자간을 맞추고 긴 줄을 내리며 질서를 쌓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옆에서 듣던 저는 문득 헤밍웨이가 떠올랐습니다. 헤밍웨이는 글을 쓸 때 종이에 출력될 모습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합니다. 때때로 디자인적 관점에서 페이지를 헤치는 문장이 있으면 과감히 쳐내기도 했다죠.
그러고 보면 개발자의 일도 결국엔 언어의 작동 논리를 고민하는 '언어를 다루는 일'인 것 같습니다. 동사와 명사로 네이밍을 하고, 재차 리팩토링해서 낭비를 줄이는 일은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과 똑같아 보입니다.
개발도 언어의 일이라면, 결국 끝은 간결함일 것입니다. 간결함은 언어의 숙명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핵심을 빠뜨리지 않는 일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단편을 쓰기는 장편을 쓰는 것보다 어렵고, 시를 쓰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명량>의 흥행이 몰아칠 때 페이스북에서 많은 분이 “명량을 보고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읽었다”고 얘기하는 걸 봤습니다. 그때 그걸 보고 저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간결함에 처음인 것처럼 다시 놀랐습니다.
이순신에게 깨진 일본군은 앙갚음을 위해 이순신의 고향에 갑니다. 이순신의 가족은 무참히 도륙당합니다. 제일 아끼던 잘생긴 아들 이면도 칼을 맞고 어깻죽지가 갈라져 죽습니다. 면의 죽음을 알게 된 날의 이순신을 난중일기를 토대로 김훈은 이렇게 썼습니다.
“면의 부고를 받던 날,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내 숙사 도배지 아래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다. (…)”
“(…) 저녁때 나는 숙사를 나와 갯가 염전으로 갔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나는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는 엄청난 문장입니다. 나로 인해 도륙당한 가족의 죽음이라는 비보 앞에서 몰아칠 당혹감, 현실과 인지의 시차, 먹먹함, 분노, 회한, 절규, 속수무책의 무력감 같은 온갖 감정들을 다 걷어버리고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고 이순신은, 그리고 김훈은 썼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다시 봐도 황당할 정도로 엄청난 문장입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의 경제성도 마찬가집니다. 비보 앞에서도 당도한 적들에 맞서지 않을 수 없는 장수의 처참함을 일곱 글자에 담았습니다.
간결함이 끝인 언어의 정수는 시일 것입니다. 만약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와 같은 문장을 개발언어로 쓰는 슈퍼개발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을 ‘포에틱 프로그래머(Poetic Programmer)’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