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25. <제이슨 본> 대기업 박차고 나와 스타트업에 취업한 제이슨 본
2016년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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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우리 스타트업에 제이슨 본이 출근하고 있습니다. 본은 일도 참 잘하고 아주 맘에 쏙 드는 신입사원입니다. 신속한 일 처리와 확실한 마무리, 절도있는 태도와 프로페셔널한 책임감까지. 이 친구는 화장실도 신속하고 절도있게 갔다 옵니다.

본이 작성한 엑셀에선 절도를 넘어 품위마저 느껴집니다. 양식과 내용에 군더더기라곤 없죠. 읽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 있어 늘 가장 경제적인 동선으로 내용을 전개합니다. 다 읽고 나면 거의 라이플로 마음을 저격당하는 수준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본은 사무용품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사원입니다. 본에게 볼펜이나 연습장은 거의 무기와 다름없습니다. 거기다 운전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퇴근할 때 자꾸 익스트림 웨이즈(Extreme Ways)를 크게 틀어놓고 가는 점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는 우리의 유망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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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할까 봐 뛰어오는 신입사원 제이슨 본.

사실 스펙으로 치면 본은 우리 같은 쪼렙 스타트업에 어울리는 인재는 아닙니다. 그의 고향 미국에 있을 때 본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서 일했거든요. 그것도 핵심부서 에이스로요. 그가 우리 스타트업에 입사지원서를 냈을 때는 솔직히 "아니 왜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면접장에 본은 이미 와있습니다. 문을 잠가둔 것 같은데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제야 본이 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스타트업에서 일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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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본이 제출한 신분증 사본.

대기업에 다닐 때 본에게는 본드라는 이름의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본드의 사원번호가 007이었고 본의 사원번호가 008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둘은 입사 동기였습니다. 두 사람은 회사의 기대를 온몸에 받는 투톱이자 업무영역이 겹치기까지 해서 자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은 본이 더 잘했습니다. 하지만 승진은 본드가 훨씬 빨랐습니다. 본은 일의 핵심을 찌르며 해치웠습니다. 본에겐 뭣이 중헌지를 한눈에 꿰뚫어보는 상황판단 능력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업무를 파악해 우선순위를 두며 효율적으로 일했습니다. 허례허식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는 엑셀도 PT도 전혀 꾸미지 않고 제출하며, 오직 내용으로 승부했습니다. 아부도 할 줄 몰랐고, 부장의 아재 개그에 웃어주지도 않았습니다. 허례허식은 거두고 핵심만 간결하게, 그것이 사내 최강자 본의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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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장 동료와 참참참 중인 제이슨 본.

본드는 정반대였습니다. 화려한 보여주기 액션을 취하는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전시행정도 중요히 여겼고, 부장이 아재 개그를 하면 과장된 액션으로 응해주었습니다. 여직원과 함께 일할 때면 비싼 수트를 빼입고 찡긋 윙크하며 환심을 사기도 했다네요.

본드는 높으신 분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회사방침을 따르는 일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사의 갑질에 피해 입는 하청업체들이 있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손해 입은 사람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회사의 과오를 사과하기도 했던 본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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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라이벌이었던 본드 사원.

본드는 그러면서 늘 좋은 차를 탔고, 온갖 값비싼 신제품을 사들이며 재력을 과시했습니다. 소위 ‘트로피 와이프’로서 예쁜 여자들도 끊임없이 사귀었습니다. 사람들은 본드의 그런 모습을 부러워하며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그를 ‘21세기 성공한 남자의 아이콘’으로 여겼습니다. 딱 한 사람만 빼구요. 본은 기름기 흐르는 본드의 삶에서 허례허식, 패거리주의, 권력의 갑질, 엘리트주의, 물질만능주의를 보았습니다.

누구보다 능력 있는 사원이던 본은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본질을 놔두고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업무환경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높으신 분께서 참석하시기로 하셨다며 근무시간에 직원으로 하여금 야유회 답사를 보내는 회사의 경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어제나 내일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작일, 명일 같이 어려운 말을 써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능력 좋은 본에게도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멋지게 사표를 던지긴 했지만, 막상 실업자가 되고 나자 본도 꽤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이 시기엔 식비를 아끼려고 맨날 감자만 먹었다고 하네요. 지금도 본은 감자라면 질색을 합니다. 엊그제 점심때 감자탕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질색팔색 하면서 혼자 사무실에 남아 본도시락을 시켜먹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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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나온 후 감자만 먹던 시기의 제이슨 본. 실업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진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본은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게 잘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늘 표정이 없고 그늘로만 다니니까 도통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요. 그래도 일할 때는 확실히 신나 보입니다.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본처럼 체질적으로 못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대기업보단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네요. 이렇게 일 잘하는 직원에게는 역시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기가 잘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최고인 것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 Universal Pictures,
Sony Pictures,
20 Century Fox

김상천 coo@slogup.com 슬로그업의 영화 좋아하는 마케터. 창업분야 베스트셀러 '스타트업하고 앉아있네'의 저자입니다. 홈·오피스 설치/관리 플랫폼 '쓱싹'을 운영하고 앉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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