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24. <500일의 썸머> 연애와 스타트업
2016년 08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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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팀엔 ‘1의 법칙’이라는 몹쓸 저주가 있습니다. 팀 내에 연애를 하는 사람의 수가 늘 1명뿐입니다. 잠깐 여러 명일 때가 있어도 한 달쯤 지나면 생존자는 다시 1명이 됩니다. 어쩌다 이런 극악무도한 저주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벌써 2년이 넘게 지속하고 있습니다. 진짜 불쌍하지 않습니까? 지금 코끝이 찡해지셨다면 눈물 흘리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울고 있거든요...

2

“썸머 덕분에 말이야, 어떤 일이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좋아. 뭐랄까.. 인생은 가치 있는 거라는 느낌말야.”
- [ 86 ]일의 톰

연애와 스타트업은 묘하게 닮았습니다. 둘 다 크고 뜨거운 감정을 쏟는 일이라 그런 걸까요. 톰이 썸머를 만났을 때와 같이 이 여자다! 싶은 이상형 앞에서 설레는 마음과, 이거다! 싶은 사업아이템을 찾았을 때 두근대는 가슴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마치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머릿속이 환해지고, 세상에 못할 게 없을 것 같이 느껴지죠. 깊은 곳의 무언가가 채워진 듯한 충만함이 차오릅니다(이 이상형과 사업아이템을 ‘여름이’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길고 긴 고민과 준비의 시간을 지나 기대를 안고, 또 꼭 그만큼의 무서움을 품고 던진 고백을 여름이가 처음으로 받아줬을 때, 그때 우리도 영화 속의 톰처럼 온몸으로 기뻤습니다. 이때는 뭘 해도 잘 풀립니다. 갑자기 세상이 좀 만만해 보입니다.

3 “전 누군가의 여자친구로 남고 싶지 않아요. 사실 ‘누군가의 뭔가’가 되는 것 자체가 편치 않아요. 전 제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싶어요.”
- [ 27&28 ]일의 썸머

그러나 연애도 사업도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그대로 되지만은 않습니다. 시련은 어김없이 옵니다. 내가 바랐던 여름이의 모습과 현실의 여름이는 여러모로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여름이와 함께 하는 완벽한 미래를 그려왔는데, 내가 그려온 이 그림은 정말 아름다운데, 현실은 왜 이리 내 맘을 몰라주는지 야속합니다.

결국 우리의 연애는, 우리의 사업은 처음 그리던 모습과는 꽤 다른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면서 속이 많이 탑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깨지며 어느 정도 타협도 해야만 합니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좋거든요. 그래도 내 인생에서 여름이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야, 이런 생각에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4 “썸머를 사랑해. 그녀의 미소를 사랑해. 그녀의 헤어스타일도 좋고 무릎도 좋아. 목에 있는 하트 모양의 점도 좋고, 그녀가 가끔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것도 사랑스러워. 웃음소리도 좋고, 잠든 모습도 좋아.”
- [ 86 ]일의 톰

“난 썸머가 싫어. 삐뚤삐뚤한 이도 싫고, 60년대 헤어스타일도 싫고, 울퉁불퉁한 무릎도 싫어. 목에 있는 바퀴벌레 모양의 점도 싫고, 말하기 전에 혀를 차는 것도 싫어. 목소리도 싫고, 웃음소리도 싫어.”
- [ 388 ]일의 톰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연애도 사업도 잘 풀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시련을 딛고 행복한 미래에 함께 닿을 수도 있지만, 도중에 헤어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시련에 치이다 보면 이내 지치게 됩니다. 처음엔 마냥 좋게만 보이던 여름이의 모습도 이제는 결점들이 되어 눈에 밟힙니다.

‘너한테 이런 결점들이 있는 줄 미리 알았다면 처음부터 너랑 시작하지도 않았을지 몰라.’ 마음이 너무 지치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까지 품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래도 이제 와 놓을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여름이가 좋고, 조금만 더 차분히 해결해나가면 다시 행복한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5

“오빠는 자신이 원치 않는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무서운거야. 그래서 아름다운 환상에 숨으려는 거지.”
- [ 80 ]일의 레이첼 (톰의 여동생) 

“오빠가 썸머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알겠는데 아니라고 . 지금은 그냥 좋은 점만 기억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오빠도 알게 거야.”
- [ 399 ]일의 레이첼

어쩌면 여름이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건 특별히 좋은 사업아이템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레이첼 말처럼 콩깍지가 만든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연애를 하고 있을 때, 사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는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죠. 시간이 지난 후 돌아봤을 때에야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속상한 일입니다. 더 좋은 짝을 한 번에 만나는 행운이 따라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후회할 필요도, 애써 잊으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시간 동안 자기감정을 진심으로 대했다면 괜찮습니다. 그로 인해 분명히 값진 것들을 배웠을 겁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전인권 형이 그랬습니다.

6

“만나서 반가워요. 전 어텀(Autumn)이라고 해요.”
- [ 500 ]일의 가을이

계절은 바뀝니다. 겨울 뒤에 또 겨울이 오는 법은 없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차분하고 선선해서 좀 더 편한 가을이 옵니다.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좋은 사업아이템 역시 또 나타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러니 문제는 없습니다.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연애도, 사업도, 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Fox Search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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