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운동장을 뛰다가 골대 옆에 바람 빠진 축구공이 있길래 차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힘껏 페널티킥을 차다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서나 보던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게 이렇게 아픈 줄 처음 알았습니다. 고통은 10분 정도 지속됐습니다. 그 강도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고딩 때 구렛나루 기르다 걸려서 하키채로 허벅지를 얻어맞은 직후 딱 그 정도였습니다.
걷지도 못하겠어서 구석에 앉아있었더니 다행히 나아졌습니다. EPL을 7년 넘게 봤기에 많은 햄스트링 부상 장면을 목격했지만, 보는 것과 직접 겪어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이었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역시 보고 아는 것과 경험으로 아는 것은 체험의 순도 면에서 비할 바가 못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르는 놈이 어디서 보고 와서 까불면 이렇게 혼나나 봅니다 흑흑.
‘관람’이라는 말보다 ‘체험’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영화. <하드코어 헨리>는 이렇게 평할 수 있습니다. 상영시간 96분 전체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FPS게임처럼 화면 아래에 주인공의 손이 보이네요. 독특하고 용감한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안드레이 디멘티에프 등 헨리를 연기한 배우들(주인공 얼굴이 안 나오는 영화라 여러 사람이 연기했다고 합니다)은 1인칭 시점을 담기 위해 고프로를 개조한 헬멧을 쓰고 촬영과 연기를 동시에 했습니다. ‘어드벤쳐 마스크’라고 이름 붙인 이 헬멧은 이마에 마이크가, 턱에 카메라가 달려있습니다.
이 특수장비의 개발배경에는 촬영장비 및 인력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하드코어 핸리>가 200만 달러(한화 약 22억 원)의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스타트업들도 시드머니 투자를 유치한 바 있는 인디고고(Indiegogo)에서 제작비를 투자받기 위해 감독은 영화 일부를 유튜브에 먼저 공개하기도 했다죠.
이 독특한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한 부분은 장비나 펀딩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턴트맨을 포함한 배우들이 엄청 고생했다고 하네요. 촬영 후기를 보면 어떤 이는 얼굴을 다섯 번이나 꿰맸고, 어떤 사람은 이가 박살 나서 임플란트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1인 다역은 말할 것도 없구요.
없는 장비까지 개발해가며 온몸으로 생고생해서 찍은 만큼 액션의 몰입도만큼은 확실합니다. 어떤 리뷰어는 “이 영화는 ‘감정이입’이 아닌 ‘감각이입’이었다”고 평했는데요. 적절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상영시간 내내 관객은 주인공의 시선을 공유하게 됩니다. 헨리가 아래로 떨어지면 나도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간접 체험하고, 얻어맞을 때는 주먹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대신 드라마는 깨끗이 포기합니다. 영화 전체가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에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할 방도가 묘연했거든요. 일리야 나이슐러 감독은 마치 “닥치고 액션이나 보라”는 듯이 아예 헨리가 말을 못하는 상태로 설정했습니다.
이 때문에 평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영화계의 혁명’이라는 극찬과 ‘멀미 나서 상영 중에 나온 내용도 없는 영화’라는 혹평을 동시에 듣습니다. 비유하자면 롤러코스터 같은 영화랄까요. 오르내리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만, 대신 그만큼 현기증 나는 영화이기도 한 것 같네요.
저는 전자입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1인칭으로 본 이 뻔한 스토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특히 퀸(Queen)의 '돈 스탑 미 나우(Don’t Stop Me Now)'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인칭 액션씬에선 아드레날린이 솟았습니다. 핸드핼드로 찍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퀀스나 <킹스맨>의 교회 액션 시퀀스에 비견될만한 몰입감이었습니다.
엔딩크레딧이 오를 때 영화를 되돌아보며 ‘1인칭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개인의 경험은 3인칭의 시선에서는 절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꼼꼼히 봐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온전한 이해에 이를 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뒤집어보면 뭐가 됐든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아니 최소한 바로 앞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건 그냥 모르는 것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인칭의 물리적 경험이나 과정의 고통은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이니까요(늘어난 제 햄스트링이 알려줬습니다).
스타트업을 함에 있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일에서도 이 부분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그것은 계획일 뿐, 막상 경험해보면 예상과 다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삽질의 기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계획을 세웠을 때 우리는 곧 ‘계획차질’이라는 허들에 부딪힙니다. 내가 안다고 착각하는 게 뭐였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삽질할 수 있음.’ 계획을 세울 때 이 문장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기간설정에서도 삽질을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신문 인터뷰나 책으로 보고 안 것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네요. 1인칭으로 깨져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STX Productions, L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