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제껏 본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잘 만든 오락영화가 뭐라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해외 <인셉션>, 국내 <타짜>를 꼽겠습니다.
두 영화는 질리도록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특히 인셉션은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풍부하고 깊어서, 이 영화 한 편을 놓고 논문을 쓴대도 수십 편은 나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만큼 쉽게 풀어낸 크리스토퍼 놀란형은 정말 대단한 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르를 막론하고 좋은 텍스트는 늘 해석의 폭이 넓죠. 인셉션은 ‘스타트업 성장영화’로 봐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요? 이제부터가 제대로 엉뚱합니다. 자, 테크 스타트업 ‘Inception, Inc.’의 창업 멤버를 소개합니다.
엔젤 투자자 사이토의 투자제안을 받아들인 코브는 팀 빌딩에 착수, 팀원 모집에 나섭니다. 열혈창업자 코브는 로켓펀치와 더팀스에 공고를 올려놓고 이력서를 기다리는 흔한 채용과정을 거부합니다. 교수님 추천으로 기획자를 알아보는 한편, 서버개발자 신규채용을 위해 당장 인도까지 날아가죠. 이전 프로젝트에서는 서버가 불안불안 했거든요. 역시 잘 나가는 테크 스타트업이라면 팀원 중에 인도인 천재 개발자 한 명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서프의 서버는 오토스케일링 지원은 물론, 견고한 계층적(hierarchical) 레이어 시스템을 쓰고 있어서 동기화된 킥으로 모든 레이어를 동시에 공격하지 않으면 절대 터지지 않습니다. 대사 중에 기존보다 20배 더 안정적이고 쌩쌩하다는 설명이 있죠(그 탁월한 서버개발 능력의 원천이 실은 뽕이라는 사실상 공공연한 소문이 있긴 합니다).
마케팅 이사 자리는 이번에도 임스에게 맡깁니다. 임스의 특기는 타인의 습관이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거부감 없이 타겟에게 접근하는 능력입니다. 이번에도 구글 애널리틱스와 연동해 고객(피셔)의 라이프사이클을 분석해서 ‘금고’를 여는 실적을 올리죠. 역시 마케팅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획한 고객 친화적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코브와 오래 호흡을 맞춰온 프론트엔드 개발자 아서도 자연스레 합류하게 되고, 이제 팀은 기획자만 있으면 완성이 됩니다. 이전 프로젝트까지는 인건비 절감을 위해 코브가 기획업무까지 다 했었는데요. 업무량 과다로 그만 코브에게 마음의 병이 생겨버렸습니다. 여러분, 사업도 중요하지만 너무 달리기만 하면 몸 상해요.
여하튼 코브는 교수님 추천전형으로 면접을 본 아리아드네를 끈질기게 설득합니다. 아리아드네는 기획 및 UX 디자인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기획꿈나무인데요. “로켓에 자리가 안 난다면, 위아래를 뒤집어서 타고 있는 사람을 떨어뜨려라”라는 코브의 명언에 감동해, 결국 휴학계를 내고 스타트업 Inception, Inc.에 합류합니다. 물론 집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 드디어 팀원 모집이 끝났습니다. 팀원 모집만으로도 이렇게 할 게 많다니 역시 사업은 어렵습니다. 마침내 맥북같이 생긴 드림머신을 열고 개발을 시작하려는 찰나, 전부터 불안하던 부분에서 역시나 문제가 생깁니다.
투자자로서 자금지원만 해주는 줄 알았던 사이토가 은근히 사사건건 관여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자기도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 참 내 역시 이럴 줄 알았다”고 코브는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내색을 비춰온 투자자를 이제 와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이토에게 대외협력이사라는 애매한 명함을 파주며 달랜 뒤 드디어 제품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때 Inception, Inc.에서 사이토의 롤은 코브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코브가 저번 사업이 망한 것을 만회하고 싶은 욕심에 MVP부터 뽑는 대신 처음부터 사업 사이즈를 너무 크게 키웠거든요. 이때 사이토가 없었다면 코브는 얼마 못 가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코브의 자서전을 보면 나중에야 자신도 이를 깨닫고 그때부터 사이토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 코브의 자서전 ‘스타트업 하고 앉아있네’ 발췌
(…) “사업이 데쓰벨리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언론은 림보라는 단어를 들먹여가며 우리의 정체기를 조롱했다. 막대한 투자금을 부었는데도 Inception, Inc.가 수익모델을 도입하지 못하자 사이토는 실의에 빠지며 폭삭 늙어버렸다. 사이토는 꼭 40년은 늙어 보였고, 스트레스성 탈모가 심했다. 이때 나는 실의에 빠진 사이토에게 몇 날 며칠을 찾아가며 온갖 정성으로 설득했고, 결국 사이토는 다시 건실한 엔젤투자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엑싯 후 사이토는 다시 젊어진 모습을 되찾으며 내게 눈인사를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테크 스타트업으로서, Inception, Inc.는 결국 성공합니다. 멜이라고 이름 붙인 버그가 자꾸 나타나는 바람에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요. 이 성공에도 사이토가 크게 관여했다죠. 사이토가 사업적으로 크게 다치며 재정에 위기가 생긴 것입니다. 무한한 줄 알았던 투자지원이 끊길 위험에 처하자 Inception, Inc.는 전에 없이 시간적 압박을 느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탓에 빠르게 수익모델 안정화를 서두르며 ‘폭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문제는 돈이네요. 음?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죠? (♪ 빰-빠밤-빠밤-빠밤빠, 밤-빠밤-빠밤-빠밤빠) 아.. 퇴근을 알리는 에디트 삐아쁘의 노래 ‘후회하지 않아’가 흘러나오네요.
“Non, Je Ne Regrettte Rein~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난 공무원시험 대신 스타트업에 온 걸 후회하지 않아~ 11시 칼퇴근을 한데도 괜찮아~).” 저도 이만 퇴근해야겠습니다. 다음 주엔 좀 더 정상적인 원고로 뵙겠습니다.
Editor's Note: 스타트업 하는 게 영화 만드는 일과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 1회 스타트업과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김상천 팀슬로그업 COO coo@slogup.com
이미지 출처: 2010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