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철이 없었을 땐 누군가에게 칭찬받지 못하면 잘 못 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사람들 시선을 의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땐 사람들이 평가하는 내가 나인 줄 알았습니다.
거짓말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어오면, 그땐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으면서 핑크 플로이드라고 말했습니다. 진짜 좋아하는 밴드는 라디오헤드였지만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밴드의 이름을 말하기는 싫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매사에 그런 식이었던 것 같네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였겠죠. 뭐라도 있어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지나고 나서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게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무가치한 일에 가치를 두고 산다는 게 어찌나 소모적인 일인지 알았습니다. 그냥 내가 재밌는 일,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였는데. 처음부터 눈치 볼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걸 알게 된 뒤부터는 좀 편해졌습니다.
‘어떤 태도로 남은 삶을 살 것인가.’ <서칭 포 슈가맨>은 이 귀한 질문에 스며들게 하는 영화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영화입니다. 세상엔 별의별 영화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영화는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화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의 특별한 소재 때문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은 두 장의 앨범을 남기고 사라진, ‘로드리게즈’라는 실존 뮤지션을 찾아 나서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슈가맨’은 로드리게즈의 첫 앨범 타이틀곡이죠. 마치 ‘그것이 알고싶다’처럼 그의 흔적을 따라 주변에서 안으로 추적해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응? 로드리게즈? 처음 들어보는데?”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에서 로드리게즈의 앨범은 그야말로 실패였거든요. 전혀 팔리지 않았기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로드리게즈를 극찬했습니다. 프로듀서들은 그를 “밥 딜런보다 더 위대한 뮤지션”이라고 평했습니다. “로드리게즈는 내 평생의 가장 위대한 뮤지션 탑 5안에 든다.” 이건 마이클 잭슨, 마일스 데이비스, 스티비 원더 등 수많은 레전드들의 앨범 작업을 함께한 서섹스레코드(Sussex Records)의 대표가 한 말입니다.
실제로도 그의 음악은 아름답습니다. 이런 위대한 뮤지션이 왜 그토록 외면당한 걸까요?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이 부분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네요.
영화는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멀리 남아프리카에서 로드리게즈는 20년 동안이나 히트한 전설적인 존재였습니다. 50만 장 넘게 레코드가 팔렸고, 수 백만 장의 해적판이 나라 전체에서 울렸습니다. 거의 전 국민이 그의 첫 앨범 모든 곡 가사를 외워 따라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남아공에서 그는 롤링 스톤즈 위에 있다”고 말하네요. ‘미국에선 zero, 남아공에선 hero’라는 어느 기사의 제목 그대로였습니다.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 모든 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로드리게즈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억압받던 남아공 사람들이 처음으로 체제의 오류를 직시하게 한 목소리였습니다. 나라 전역에 변화를 촉발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실패로 막을 내린 그의 음악은, 놀랍게도 멀리 남아공에 와 20년이 넘도록 수천만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자연히 남아공 사람들은 그를 궁금해합니다. 다른 뮤지션과 달리 로드리게즈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거든요. 사람들은 가사집 단어들을 뜯어보며 그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로드리게즈를 찾는다’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실마리는 많지 않았고, 결론의 빈자리는 소문들이 채웠습니다. ‘무대 위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로드리게즈는 또 한 명의 자살한 천재 뮤지션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수년이 흐른 뒤, 끈질기게 그의 실마리를 쫓던 사람들에 의해 믿기지 않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로드리게즈는 살아있었습니다. 뮤지션이 아닌 임금노동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앨범 발매나 콘서트는 없었고, 오물을 치우거나 건물을 철거하는 막일이 그의 생계수단이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이거였습니다. 로드리게즈는 자신이 남아공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걸 지금껏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척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앨범이 팔렸다는데 정작 자신은 한 푼도 못 받았으니까요. 이제라도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을 것 같습니다. 레코드사에 소송을 걸고 또 지금이라도 3집을 내면 더이상 임금노동은 안 해도 될 테니까요.
하지만 로드리게즈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 진가를 몰라준 세상을 원망하며 눈물을 훔치지도 않습니다. 마치 ‘아 그런 일이 있어요? 그것 참 재밌는 일이네요’라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의 보폭으로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로드리게즈에겐 어떤 초월성이 있었습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초연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삶의 품격이라 불러야 할까요. 그건 저 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어떤 고귀함이었습니다.
다만 로드리게즈로부터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힌트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누가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못하는 건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게 주어지는 상을 내가 못 받았다고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의 보폭으로 자신의 길을 걷는 건 절대 지지 않을 삶의 필승전략이다.'
지금 이 순간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세상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을 하면서도 꼭 인터뷰면에 실리고 강연요청을 받고 페이스북 친구가 많아야만 잘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묵묵히 자신의 가치를 쫓는 스타트업계의 슈가맨들을 조용히 응원합니다.
이미지 출처: Sony Pictures Classics,
Andy Paradise from www.paradisephoto.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