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16. <커피와 담배> 하루의 동력이 되는 작은 휴식
2016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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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동안 스타트업을 하면서 조금 지쳤다면, 시끄러운 음악도 현란한 3D 영화도 싫고 그냥 좀 조용히 쉬고 싶은 상태라면,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커피와 담배>를 권하고 싶습니다. 커피와, 담배와, 대화. 일상 속의 작은 휴식이라 부를 수 있는 세 요소로만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전에 커피를 주제로 한 어떤 독일 추리소설을 본 적이 있는데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더는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됩니다. 테러단체에서 커피에 독약을 타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마시고 쓰러진 수백 명의 피해자를 목격하고 사람들은 겁에 질립니다. 차마 커피를 입에 대지 못하죠.

재밌는 부분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의 묘사였습니다.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일상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합니다.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더니 GDP가 급감합니다. 일터에선 각종 사고가 끊이질 않고 교통사고 사망률이 치솟습니다. 커피가 없어 집중력이 떨어지고 졸음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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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세요, 소설이지만 그럴싸하지 않나요? 커피는 역시 우리 하루의 동력이라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아무리 열정 넘치는 스타트업이래도 일상에서 커피를 뺏긴다면, 하루의 재생속도가 절대 0.8 이상은 나오지 않을 것 같네요. 실은 제가 지금 사무실 정수기에 물이 떨어져서 커피를 못 마시고 있는데요, 괴롭습니다.

흡연자들에겐 동력이 또 하나 있죠. 담배입니다. 만약 커피가 우리의 하루를 써내려가게 돕는 잉크 같은 거라면, 담배의 역할은 문장부호가 아닐까 합니다. 누구 말대로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요.

잠깐 쉬고 싶을 때 흡연자들은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웁니다. 담배를 한 모금 빨면 동그랗게 빨간 불이 켜집니다. 가속이 붙은 삶 앞에 정지! 하고 빨강 신호등을 켜는 것처럼요. 업무, 업무, 업무, 이어지는 업무들 사이에 쉼표를 찍어줍니다.

일을 해치우고 나면 또 담뱃갑을 엽니다. 일을 끝낸 후 담배를 피우는 일은 문장을 쓴 뒤에 마침표를 찍는 일과 같습니다. 흡연자들에게 일의 종료는 일을 다 했을 때가 아니죠. 일을 마친 후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울 때, 그때 비로소 일은 완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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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그리고 커피를 함께 마시고 담배를 같이 피울 때 나누는 시시한 대화. 이런 작은 휴식이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도록 회전시키는 동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커피와 담배>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커피, 담배, 그리고 한담들로 이뤄진 이 영화를 보며 어쩐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이런 작은 것들이 우리 하루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구나, 하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그렇게 공들여 만든 영화는 아닌데요. 커피와 담배와 대화가 있는 풍경이 늘 그렇듯 영화도 느슨합니다. 1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는 원래 미국판 SNL의 한 꼭지로 방영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거라네요. 짐 자무쉬는 86년부터 17년간 설렁설렁 이것들을 찍어서, 2003년에 한데 모아 장편으로 냈습니다. 다른 장편영화들 사이사이에 찍은 것이죠. 짐 자무쉬 자신에게도 이 영화는 휴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느슨하고 한가한 영화는 그래도 보는 재미가 물론 있습니다. 로베르토 베니니, 케이트 블란쳇, 빌머레이 같은 배우부터 이기 팝, 톰 웨이츠, 화이트 스트라입스 같은 뮤지션에 이르기까지, 짐 자무쉬 인맥의 힘으로 여러 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출연하는데요. 영화 속 담배 연기 희뿌연 커피 테이블에 앉아,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 그대로를 연기합니다. 11편의 단편 중엔 사실 재밌는 것도 있고 재미없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그렇듯 어떤 대화는 시시하고, 어떤 이들의 대화는 즐겁고, 또 어느 대화는 어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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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에피소드에선 이기 팝과 톰 웨이츠가 한담을 나눕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마침내 담배를 끊었다면서, 그러고 나니까 새로운 삶이 열렸다면서 한참을 떠듭니다. 얼마 후 “끊었으니까 한 대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죠. 커피를 홀짝여가며 맛있게 피웁니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케이트 블란쳇은 케이트 블란쳇과 대화합니다. 1인 2역을 하며 자신과 대화하는 자신을 연기하는 이 배우를 넊놓고 보고있노라면,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런 식입니다. 그냥 한가하고 시시한 대화들 11편으로 구성된 영화죠. 하나같이 커피와, 담배와, 대화가 있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맘을 내려놓고 보다 보면 어쩐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벤져스>나 <곡성>같이 짱짱한 영화들도 좋지만, 그런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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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게 꼭 다 화려한 영상미와 탄탄한 완결성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의 하루에도 때론 느슨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왜 스타트업을 하다 보면 쉴 때조차 괜히 죄책감이 들고, 이렇게 쉬어도 될까 싶은 찜찜한 감정을 느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그럴 때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노트북을 켜고 앉아서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러나 잠깐 쉬면서 열심히 회복하는 일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갈 길이 머니까요. 커피와 담배라는 작은 휴식이 하루의 동력이 되는 것처럼, 크게 보면 이따금의 느슨한 하루는 삶의 동력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에게도 때론 느슨한 풍경이 필요합니다. 이 영화처럼 커피와 담배와 시시한 대화가 있는 풍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죠. 아니면 공원도 좋고 술도 좋겠습니다. 쉴 때는 괜히 조바심 갖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푹 쉬세요.

이미지 출처: Metro-Goldwyn-Mayer Studio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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