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는 묘한 영화입니다.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사랑 얘기가 마치 나의 추억이라도 되는 양, 영화 포스터만 봐도 애잔함이 오는 이상한 영화입니다. 마치 전 여친이 좋아하던 음악을 듣게 됐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감정처럼요.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에 애틋한 정서를 갖고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남자들이요. 이 서툴고 진지한 남자의 보편적으로 지질한 첫사랑이 마치 나의 기억인 듯 공감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봄날은 간다>는 청각을 자극하는 영화죠. 상우는 듣는 사람입니다. 소리를 채집하고 담는 사람입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의 일이란 산사의 눈 내리는 새벽이나 대나무의 흔들림을 녹음기에 담는 일입니다. 조용히 손을 모으고 앉아서, 아마도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까지 유심히 듣겠죠. 상우는 감정이 섬세하고 깊습니다.
은수는 말하는 사람입니다. 다 드러내지 않고 정제된 이야기만을 하는 직업, 라디오 PD 겸 아나운서입니다. 상우보다 나이가 많고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너무 깊이 담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깊은 마음은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상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영화 도입부에 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온 상우의 앞에 흰 벨벳처럼 첫눈이 깔려있습니다. 상우는 뽀득 소리를 재밌어하며 천진하게 그 위에 발자국들을 남깁니다. 멀대같이 키 큰 남자가 꼭 순수한 아이 같아 보이네요. 상우는 첫눈처럼 순수하고 그래서 아직 조금 촌스러운,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만약 마당에 있던 사람이 은수였다면 첫눈을 상우만큼 반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은수는 눈을 보고 나서 먼저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그러나 출근길이 막힐 것 같다는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은수라는 인물은 ‘소화기 씬’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죠. 녹음을 마치고 방송국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자판기 옆에 놓인 소화기를 보고 은수는 상우에게 묻습니다. “소화기 사용법 아세요?” 그리곤 소화기 작동법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동안 여기서 커피 마시며 다 외웠다면서. 이혼 경험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난 직후에 꺼낸 말이었죠. 은수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뜨거워지지 않게끔 감정의 과열을 진화하는 법을 알고 있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감정의 온도 차가 있는 채로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그 유명한 온 국민의 작업 대사 “라면… 먹을래요?”를 들은 밤부터죠. 상우는 은수를 마음에 담습니다. 사실 누가 안 그랬겠어요. 이영애 같은 여자가 라면 먹자고 하면 진라면 신라면 안성탕면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상우의 감정은 점점 깊어집니다. 술 취한 밤 은수가 보고 싶어서 친구 택시로 강릉에 달려갈 정도로 애절해지죠. 반면 은수는 너무 뜨거운 상우가 차츰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과거의 아픈 경험은 상비된 소화기처럼 어느 구석에 남아 또 너무 뜨거워지려 하면 감정의 불씨를 꺼뜨려 버리는가 봅니다.
<봄날은 간다>가 보여준 이 크고 뜨거운 감정. 이게 바로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우리가 느끼는 애틋함의 정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모든 걸 바칠 만큼 큰 감정이요. 그런 아주 큰 감정은 인생에서 사용횟수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틋한 기억으로 남는 거겠죠. 그게 사랑이든 아니면 일이든 간에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우는 갈대밭에서 서서 갈대를 흔드는 바람의 소리를 녹음합니다. 그 모습은 허수아비와 닮았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이때 상우는 씨익 웃어 보이네요.
다른 사람들의 해석과 달리 저는 그게 상우의 성숙이나 달관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현실의 상우라기보다는 어떤 이미지라고 봤습니다. 그 웃음 때문에요. 상우의 웃음엔 달관하는 씁쓸함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냥 좋았던 어떤 것을 떠올릴 때 웃는 웃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상우가 이 연애를 되돌아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그 자리에 남아 상우를 반길 거라는 걸 암시하는 장면은 아니었을까요.
상우가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진지함을 봤기 때문입니다. 눈치 보거나 계산하지 않고 자기감정에 전력을 다한 상우는, 자신도 그걸 알기에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은수는 그러지 못했다는 걸 알기에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상우를 붙잡으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 영화에서 ‘뜨겁고 큰 감정의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인생에서 그런 큰 감정의 사용횟수는 절대로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애든 일이든 취미든요. 뭐에 홀리듯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것도 뜨겁고 큰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니 상우의 연애처럼 서툴고 촌스럽더라도, 어쨌든 그 감정을 온 힘으로 진지하게 대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네요. 인생에 몇 번 없을 그런 귀한 감정은 온 힘으로 진지하게 대하는 게 자신의 삶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지 출처: 시네마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