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35. 설국열차 – 대한민국이라는 열차에서 문 열기
2016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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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일로 국민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최순실, 최태민, 탄핵, 하야, 시국선언, 특검… 실시간 검색어만 봐도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정치사를 모두 살펴보더라도 이처럼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요?

장르나 강도(强度) 면에서 상상을 초월하긴 했지만, 사실 언젠가 터질 일이었다는 느낌도 듭니다. 권력을 움켜쥔 자들의 부정부패, 그 악취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죠. 극장에만 가봐도 그랬습니다.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내부자들>, <베테랑>, <터널> 등 크게 흥행한 한국영화들 가운데엔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분노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극장이 분노하는 동안 서점은 병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서점은 아프고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스크린 안의 권선징악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불량식품 같은 책 속에서 새콤달콤한 위로를 찾는 일이 이 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생활입니다. 판타지만이 위안이라니 얼마나 슬픈 사회구조입니까?

지금 대한민국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한 편의 영화는 <설국열차>입니다. 칸칸이 나뉜 계급구조, 좋은 자리를 꿰찬 자들의 몰염치, 엔진을 장악한 소수와 부품이 된 나머지 사람들. 전에 영화를 봤을 땐 열차에 들어찬 이런 부정적 상징들이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그걸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노골적이라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전혀 과하지 않고, 그냥 대한민국 그 자체였네요. 설국열차는 '메이드 인 코리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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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얼어붙은 세상을 내달리는 열차는 하나의 국가와 다름없습니다. 열차 안에서 한정된 자원을 두고 더 가지려 하는 자본주의 구조를 답습합니다. 머리 칸으로 갈수록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호화로울수록 염치가 없어집니다. 반면 꼬리 칸에선 바퀴벌레 양갱을 먹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은 이 구조가 바뀌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자원이 공정히 분배돼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들은 늘 더 갖기를 원하고, 그러므로 더욱더 착취합니다. 마이크를 들고 “모두에게는 정해진 위치가 있으며, 이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국가가 무너지고 만다”고 겁을 줍니다. “지도자는 위대하고, 엔진은 신성하다”고 외치면서 스스로 세뇌당합니다. 엔진은 끊임없이 회전합니다. 부품이 된 대중을 착취하며 얻은 동력으로 말이죠. 열차는 쉬지 않고 정해진 길을 따라 내달립니다.

<설국열차>가 개봉한 2013년 8월엔 이런 상징과 전달방식이 과잉이라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영화 속 열차보다 더 노골적이고 상식 없는 국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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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현실과 이렇게나 닮았다면, 부조리한 구조를 깨부수기 위해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변화는 커티스(크리스 에번스 분)와 남궁민수(송강호 분)를 중심으로 꼬리 칸의 사람들이, 더는 소수 기득권층의 세계를 유지하는 부품으로 쓰이지 않겠다고 나서면서 시작됩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이들이 한 일은 하나씩 하나씩 닫힌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갑의 윽박지름과 공포정치에 맞서 악착같이 한 칸씩 전진합니다. 그 과정에 고통이 있었고, 위기가 있었고, 희생이 있었습니다. 결국, 신념과 희생의 힘으로 엔진을 멈추며 판 자체를 뒤엎어버리죠.

지금 있는 위치, 내가 있는 현실이 맘에 안 든다면 단계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결국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소신과 용기와 무언가의 희생 없이는 그런 일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식상한 나머지 오히려 새롭기까지도 한 교훈이죠. 그런데도 언제나 정답인 교훈이라 반박을 할 수 없어 더 답답합니다.

속상하지만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교훈, 감동, 재미, 정보, 다 돌아봐도 결론은 이겁니다. 부조리한 구조가 싫으면 '개겨서' 틀을 깨야 하고, '개기면서도' 잘 살려면 뭔가를 '겁나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이든, 사업을 하며 시장구조를 바꾸는 일이든 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시장구조를 바꾸는 일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스타트업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기 위해 작정하고 '개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다들 얼마나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보면서 놀라곤 합니다. 스타트업들이 하는 일은 영화 속 커티스 들이 했던 일과 똑같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문을 열 때마다 또 뭐가 나타날지,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알지 못하면서도요. 다만 문 뒤엔 늘 새로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서, 일단 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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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설국열차라서 안타깝습니다. 정치권은 부패했고, 시장은 소수의 욕심 많은 자가 오래도록 독식하고 있습니다. 갑질과 착취가 일상인 사회구조입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조금씩이나마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하고, 그래서 희망은 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볼 가치는 있습니다. 문을 열고 전진하다 보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열릴 수도, 스타트업은 '엑싯(exit)'이라는 출구를 만날 수도 있겠죠. 저도 더 열심히 '개기면서' 살겠습니다.

영화 이미지 출처: CJ E&M, The Weinstein Company

김상천 coo@slogup.com 슬로그업의 영화 좋아하는 마케터. 창업분야 베스트셀러 '스타트업하고 앉아있네'의 저자입니다. 홈·오피스 설치/관리 플랫폼 '쓱싹'을 운영하고 앉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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