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출신 잘나가던 로펌 변호사, 스타트업 업계에 뛰어든 이유
2015년 01월 26일

"법률 자문, 스타트업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그래서 이 인터뷰는 시작됐다. 전기차를 만들어 한국의 엘론 머스크가 되고 싶었던 청년은 서울대 항공우주공학부에 입학했으나, 곧 현실을 깨닫고 변호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국내 6대 로펌 중 하나인 법무법인 세종에서 대기업 및 해외 유명 기업들을 대리하여 굵직한 사건을 맡아왔던 정호석 변호사. 그가 스타트업계 전문 로펌을 세우겠다고 나섰을 때 주위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망한다, 미쳤다, 1년 죽도록 고생하고 돌아와라 등등.

그리고 법무법인 세움이 개업한 지도 어느덧 3년, 그는 망하지 않았다. 망하기는커녕 프라이머, 본엔젤스, 더벤처스, 디캠프를 포함 엑셀러레이터 뿐 아니라 50개 이상의 스타트업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하며 생태계 속에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그는 어떤 기준에서 마케팅 비용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스타트업에게 '법 자문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일까. 테헤란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그를 직접 만나보았다.

DSC_0163[법무법인 세움, 정호석 변호사]

스타트업 법률 자문, 나에겐 곧 투자다

"800만 원짜리 자문을 사정에 맞춰 150만 원으로 깎아준 적이 있어요. 그것조차 여력이 안돼서 결국 6개월 후에 비용을 지급하기로 했죠. 150만 원이 없었던 그 스타트업 기업 가치가 얼마 전 400억이 넘었습니다. 대형 로펌에서 일할 때는 몰랐던 보람이 느껴졌죠. 저에겐 법률 자문이 일종의 투자인 셈입니다."

정호석 변호사를 은인으로 여기는 스타트업도 생겨났다. 대형 로펌에 있을 때 그가 '기업의 이익을 변호하는 사람'이었다면, 현재 세움에서는 이를 넘어선 '법률 멘토'이자 일종의 '지식 투자자'로서의 역할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너무 좋지 않은 경우엔 자문료를 낮춰주거나 투자 이후로 지급 시기를 미뤄준 적도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부터 신뢰 관계를 쌓은 스타트업은, 시간이 흐르고 몸집이 불어나도 꼭 정호석 변호사를 다시 찾는다. 얼마 전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73억 원의 투자를 유치한 수학 교육 스타트업 노리도 이들의 고객사다. 큐키, 마이리얼트립 등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스타트업 역시 초기부터 세움과 일을 함께 했다. 얼마 전 종영한 창업 오디션 프로그램 최상위 5개 팀 중 3팀이 정 변호사에게 법률 조언을 받았던 팀이라고 한다. 법률 자문이 투자와 같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그러나 정호석 변호사가 반드시 고수하는 원칙이 있다. '절대 공짜로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서는 아직도 지적 서비스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기때문에 법률 상담도 공짜로 하시려는 분들이 많아요. 돈 많으신 분들이 자문료를 깎으려고 들면 '우리가 망하면 스타트업 업계에 다음부터는 좋은 변호사들이 안온다, 우리가 잘돼야 미국처럼 실력있는 변호사들이 이 업계로 뛰어든다'고 말하죠. 미국에는 WSGR같은 대규모 스타트업 전문 로펌이 생겨났고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타트업이 법률 자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상부상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현재 정 변호사는 테크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인 퓨처플레이의 최고법률책임자(CLO)도 맡고 있다. 왕년 공대생으로서의 기술 지식에 변호사로서의 전문성을 더해 심사나 투자 과정에서 법적 조언을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여러모로 법률 지식이 부족한 스타트업 업계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아직 많은 스타트업이 초기 단계서부터 법률 자문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사전에 몇 가지 검토만 받았으면 간단히 예방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 일단 터지고 나면 봉합하기가 굉장히 힘들죠. 돈도 많이 들고요. 법률 자문은 보험과도 같습니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사업모델과 주주간계약서 검토

여유가 많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 입장에서 꼭 검토하고 넘어가야할 법적 사항을 추리자면 두 가지다. 바로 사업모델 검토와 주주간계약서 작성.

사업모델 검토란, 해당 비즈니스 모델이 법적으로 문제되는 여지가 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규제 문제로 작년까지 골머리를 앓았던 핀테크 분야의 경우, 법적 검토없이 뛰어들었다가는 도중 하차하기 십상이다. 실예로 장장 4년 간 사업을 해온 상태에서 뒤늦게 사업 모델이 불법 판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결국 그 기업의 경우 포기치 않고 리스크를 껴안은채 사업을 지속해나가기로 했지만, 초기 시절 간단한 법적 검토만 받았더라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정호석 변호사의 의견이다.

공동창업자가 있을 경우 주주간계약서도 초반에 신중히 다루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한국 사회는 친하면 법으로 딱딱하게 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러다가 회사가 커지거나 사업이 어려워지면 문제가 발생하는거죠. 단순히 법적으로 권리를 명문화시키는 것 뿐 아니라,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계약서란 서로 합의된 내용을 문서화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공동창업자 간의 긴 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본인들에게도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요. 결국 좀 서운하더라도 초반에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오해를 풀고 가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것입니다. 2,3년 후에 팀이 깨지면 회사도 개인도 손해가 크거든요."

정호석 변호사에 따르면 국내 VC 투자 환경에도 법적으로 개선되어야할 부분이 많다. 연대보증 문제가 대표적이다.

"기존 VC가 사용하는 투자계약서 중에서는 스타트업에게 불공정하게 쓰여진 것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연대보증을 없앴다고는 하지만, 막상 계약서를 잘 들여다보면 '연대보증'이라는 단어만 없을 뿐이지 같은 효력을 낼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놓은 거죠. 상환청구권, 주식매매청구권 등을 이용해서요. 결국 실패하면 투자금을 다 뱉어내야하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엔젤 투자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실제 엔젤의 탈을 쓴 개인투자자가 추후 무리한 경영권을 요구한 일로 찾아온 대표도 있었다. 경영권 위임을 거부하니 사업을 못하게 만들겠다고 우기며 악질적으로 보복했다. 결국 여러 건의 소송을 거친 끝에 잘 해결됐지만 법률 비용은 1억 원에 육박했다. 투자 시 계약서 검토만 제대로 했어도 복잡한 송사 걱정 없이 사업에 몰두할 수 있었을 안타까운 케이스다.

그런데 한 푼이 아쉬운 스타트업 입장에서, 자신을 선택해준 고마운 VC에게 계약서를 일일히 검토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다소 불편한 일이 아닐까. 정호석 변호사는 VC에게도 계약서 검토는 유익이라고 설명한다.

"다소 불공정한 조항같은 경우에는 VC들이 굳이 설명하거나 바꾸려고 들지를 않죠. 그런데 VC 입장에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만약 문제가 되서 싸울 경우 법정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무효화시킬 수 있어요. 무효인 조항으로 서로 에너지를 소비할 이유는 없는거죠. 처음 스타트업 업계에 들어와서 투자 계약서를 보고는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투자 받는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가치 평가를 받았는지, 또 투자 유치 이후 분기별 사업계획서는 어떻게 제출해야 하는지 등을 검토해야 한다. 투자 금액에만 눈이 멀어 계약서에 어떤 조항이 있는지, 추후 자신들의 의무는 무엇인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태도 역시 이런 기이한 투자계약서가 사용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스타트업에게도 법률 자문은 지출이 아닌 투자

스타트업에게도 법률 자문은 보험이자 투자다. 사후 수습을 위한 재정적, 시간적 낭비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정호석 변호사는 스타트업에게 있어 법은 어디까지나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 목표는 스타트업이 법률적 문제 때문에 휘청이지 않고, 그 시간에 업무에 전념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겁니다. 저희 사명이 '세움'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대기업과는 다르게 일단 도와주면 확확 커 나가는 걸 지켜볼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변호사로서의 그의 2015년 목표는 업계에 법률 자문 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대형 법무법인 못지않은 양질의 법률 서비스를 스타트업에게 제공하는 것, 그 문턱을 낮추자는 게 세움의 모토입니다. 2015년에도 법률 자문의 필요성 그리고 그것이 회사에 실질적으로 금전적 가치를 가져다준다는 인식을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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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롬 기자 (201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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