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확인하면 10초 만에 자동 삭제되는 유령 메신저 ‘스냅챗’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를 기점으로 SNS의 신(新)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스냅챗이 사람들에게서 읽어낸 니즈는 ‘휘발성’이다. 일부 매체에서는 ‘잊혀질 권리를 보장해주는 메신저’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 분명 자신의 이름을 단 흔적들이 어딘가에 흘려져 있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최근에는 이런 휘발성에 덧붙여 아예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SNS가 등장했다. 이름 없이 소셜 네트워킹이 가능할까 싶지만, 익명 게시판에 더 솔직하고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던 걸 떠올려보면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이름 없이 소통한다, 익명 SNS ‘시크릿(Secret)’
시크릿(Secret)은 이런 기류를 타고 등장한 익명 SNS다. 기존 SNS처럼 친구로 묶여있긴 하지만, 올라온 글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페이스북처럼 글이 친구들로부터의 좋아요(Likes)를 많이 받으면 친구의 친구들에게까지 노출된다.
“꼭 비밀만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예요.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죠.” 시크릿의 공동 설립자인 데이비드 마크 비토우(David Mark Byttow)는 덧붙여 시크릿은 ‘가면무도회’와 같다고 말한다. 시크릿에서는 익명의 도움을 빌어 기존 SNS에서는 숨겨두었던 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시크릿이 내세우는 슬로건도, ‘Be yourself’. 진짜 당신이 되어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타인과 연결되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죠.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정체성(identity)은 굳이 필요 없습니다.”
시크릿에 올리는 글들은 작성자에게 속해있지 않다. 즉 개인 타임라인이 따로 없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전화번호를 비롯한 사생활 침해의 위험이 거의 없는 것이 강점이다.
‘SNS의 순기능은 이상한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아다닐 만큼 다분히 공적이었던 기존 SNS 상에서는 그야말로 ‘입조심’을 단단히 해야 했다. 게다가 친구들의 화려하게 편집된 삶을 보고 있자면 ‘내 삶은 왜 이런가’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 SNS를 끊었다는 주변인도 적지 않다. 시크릿은 이러한 피로감을 덜어준다. 동시에 파스텔 톤 배경 위에 텍스트가 예쁘게 안착되어 있어, 이미지를 보는 것 같은 시각적 즐거움도 선사한다.
여러모로 매력적인 이 익명 SNS는 작년 12월 구글 벤처스를 포함한 다수의 VC로부터 총 140만 달러(약 15억 원)를 투자받으며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3세대 SNS, 익명성과 휘발성으로 흔적을 지우다
1세대 SNS에 이어 라인과 같은 폐쇄적 SNS가 등장했고, 그다음 바톤을 전해 받은 것이 요즘 인기를 끄는 스냅챗같은 휘발성 SNS다. 익명 SNS도 개인의 기록과 정체성을 남김없이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사실 익명 SNS의 선두주자는 위스퍼(whisper)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 익명성 모두 시크릿과 동일하다. 시크릿은 위스퍼를 좀 더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바꾸고, 친구 기능을 추가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초에 등장한 위스퍼는 작년 12월 기준, 한 달에 30억 이상의 페이지 뷰를 달성했으며 세쿼이아(Sequoia)를 비롯한 유수의 투자사로부터 총 2,400만 달러(한화 258억 원)의 투자를 받으며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익명 SNS에 대한 시장의 열광적인 수요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IT 전문 미디어 테크니들(techneedle)은 이러한 SNS 변화의 흐름에 대해 ‘실명과 거대담론의 페이스북, 트위터 등이 모더니즘 시대의 종결자라고 한다면, 최근 인기를 끄는 스냅챗, 위스퍼, 시크릿 등은 익명성과 사소한 내용으로 가득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트렌드인 듯하다.’고 평했다.
이렇듯 해외에서 익명성과 휘발성을 특징으로 한 SNS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시점에서, 국내 스타트업이 벤치마킹할 것은 단순한 서비스의 외형이 아니다. 이를테면 스냅챗이 성공을 거두자 국내에서는 유사한 프랭클리 메신저가 출시됐지만, 해외에서는 비즈니스를 위한 휘발성 메신저 ‘컨피드(Confide)’와 같은 응용 사례들이 나왔다. 누설되면 안 되는 비즈니스 상의 오프더레코드 메시지들이 확인하는 순간 증발되어버리는 것이다. 스냅챗과 기본 원리는 같지만 명확한 타깃을 설정하고 각도를 조금 비틀어 서비스에 새로운 색을 입혔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으면서도 정체성과 흔적은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공략한 것이 3세대 SNS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름을 가리거나 메시지를 폭파해버리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을 것이다. 지난 2012년 트위터에서 이미 한 차례 ‘대나무 숲’ 열풍이 불었고, 작년 10월에는 이를 모티브로 한 '00옆 대나무 숲' 이라는 익명 SNS가 출시됐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사례를 통해 확실한 시장 수요를 확인한 만큼, 좀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이 니즈를 풀어낼 국내 스타트업의 활약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