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버블 이후 잠잠하던 호주의 ICT 업계가 전세계적인 스타트업 붐에 힘입어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약 5년 전부터로, 현재 호주에서 스타트업 관련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곳은 단연 시드니이며 멜번과 브리즈번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2-3년 전부터 퍼스와 애들레이드가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성장 속도가 상당히 빨라 스타트업 뉴스(Startup News)의 기사 ‘The Perth Startup Scene – What You Need To Know‘에 등장하는 퍼스와 퍼스 근교 소재의 협업 공간만 해도 현재 일곱 개에 이른다.
이번 기사에서는 필자가 호주에서 가장 먼저 머무르게 된 퍼스에서 한동안 아시아 관련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기회를 통해 보고 듣게 된, 스페이스큐브드(Spacecubed)를 필두로 한 퍼스 스타트업 환경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현재 퍼스의 스타트업을 위한 협업 공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으로는 퍼스 다운타운에 2개의 센터를 가진 스페이스큐브드(Spacecubed),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싱크랩스(Sync Labs), 인큐베이터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네스트(Nest),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이노베이션센터(Innovation Centre), 자체적으로 갖춘 제조 시설 등과 함께 하드웨어 관련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디아티팩토리(the Artifactory), 예술가를 비롯한 창작 집단에게 특히 인기 있는 아토믹스카이테크허브(Atomic Sky Tech Hub), 아름다운 항구와 카페들이 늘어선 카푸치노 거리로 유명한 프리맨틀(Fremantle)에 위치한 에프스페이스(fSpace)가 있다.
이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스페이스큐브드(Spacecubed), 그리고 싱크랩스(Sync Labs)에 입주한 스타트업 데이터가미(Datagami)를 아래에 소개한다.
▲출처: Perth-Startup-Ecosystem-Infographic, http://cdn.boundlss.com/
스페이스큐브드(Spacecubed)
스페이스큐브드는 우버 퍼스(Uber Perth)를 비롯한 다양한 스타트업의 보금자리이자 Startup Weekend Perth, Gov hack과 같은 스타트업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명실공히 퍼스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참고: Detailed report and infographic reveals the Perth tech start-up scene: People and investment).
스페이스큐브드 설립자인 브로디 매칼럭(Brodie Mcculloch)은 Social innovation in Western Australia(이하 SiiWA)의 매니징 디렉터로서 SiiWA의 사회혁신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모이고 함께 협업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를 위한 그의 갖은 노력을 통해 스타트업을 위한 비영리 협업 공간 스페이스큐브드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금전적인 원조를 포함한 정부나 대기업으로부터의 스타트업 지원은 호주에서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시드니에 위치한 피쉬버너스(Fishbuners)가 호주 최대의 스타트업을 위한 협업 공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SK, KT, LG같은 거대 통신사들 중 하나인 옵터스(Optus)의 전적인 자금 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과 사회적인 관심이 이미 어느 정도 일상이 된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다들 혀를 내두르며 부러워하는 이 사람들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첫발을 내딛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쳤을지는 감히 상상도 안 간다.
커뮤니티 매니저로 스페이스큐브드의 초기 멤버이자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오필리 랫(Ophelie Rat)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필자처럼 호주로 여행을 왔다가 스페이스큐브드에 합류, 지금은 멘토링, 이벤트, 온라인 커뮤니티 등 스페이스큐브드 멤버들을 위한 프로젝트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도맡아 챙기고 있다.
스페이스큐브드가 오픈하고 딱 2주가 되었을 때 팀에 합류한 그는 이 넓은 공간에 단 20명의 회원이 있었던 때를 회상하며, 말 그대로 맨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발로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나 일일이 설명하며 입소문을 냈다고 한다. 오픈 6개월 만에 100명의 회원이 모였고, 얼마 전 2주년 행사를 기점으로 총 회원수가 450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그가 낯선 땅에서 시작한 모험은 성공적으로 결실을 이뤄내고 있는 중인 듯 하다.
스페이스큐브드는 향후 가장 중심이 될 프로젝트로 자체 엑셀러레이션 프로그램을 꼽았는데, 마케팅 매니저인 톰(Tom)과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제니퍼(Jennifer)는 현재 두 개인 스페이스큐브드 센터 수를 지속적으로 늘리는 것과 함께 대기업 및 대학교들과의 협업을 통한 엑셀러레이션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Spaceucubed 팀. 왼쪽부터 Ophelie Rat, Tom Riordan, Jennifer Payne
최근 호주 스타트업 관련 기관들이 내세우는 향후 계획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자체 인큐베이팅/엑셀러레이션 프로그램의 론칭이다. 공간이 있고 사람이 모여 있는데 왜 이렇다 할만한 자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건가 하는 의문은 철저히 내 관점에서의 생각이었다. 사업진행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앞서 말했듯 한국은 정부와 대기업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에서 스타트업이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몇몇 나라들 중 하나이며, 이러한 사회적 인식과 실질적인 지원은 모든 나라의 스타트업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 일종의 특권이다(피쉬버너스만 해도 자체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실리콘밸리의 투자 문화과 텔 아비브의 기업가 정신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 보는 우리는 어떨까?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IT인프라에 힘입은 기술 기반 스타트업의 활약이 돋보이며, 정부 및 대기업의 지원과 함께 체계적인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갖춘 관련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은 여기선 듣는 사람마다 열이면 열 모두 부러워하는 환경이다. 모름지기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데이터가미(Datagami), 싱크랩스(Sync Labs)의 대표 입주 스타트업
기회가 될 때 스페이스큐브드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둘러 보려던 차에 마침 싱크랩스에 입주해서 데이터 가공 및 시각화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 데이터가미(Datagami)를 만나게 되었다. 1인 기업이나 사회적 기업들도 입주해 있는 스페이스큐브드와는 달리 싱크랩스는 철저히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 특화되어 있는 곳인데, 항상 문을 열어두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도록 해둔 스페이스큐브드와 다르게 정문부터 카드키로 출입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Hourann Bosci(좌), Keiran Thompson(우)
일리노이에서 물리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시드니와 영국에서 기계 언어, 데이터 분석, 금융 분야에서 일해 온 케이런(Keiran)은 2002년 오스트레일리안 사브르 챔피언(Australian Sabre Champion)에 등극한 펜싱 선수이기도 하다.
호(Hourann)은 퍼스에서 태어나 UWA를 졸업한 후, 실리콘밸리에서의 첫 커리어를 애드몹(AdMob)의 UI 엔지니어로 시작했다. 애드몹이 구글에 인수된 후(AdMob이 $750 million에 구글에 인수됐던 2009년 당시 이는 구글에게 있어 DoubleClick과 YouTube에 이어 세번째로 큰 규모의 인수건이었다) 구글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다 작년에 열린 고브핵(GovHack) 해커톤 행사에서 케이런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데이터가미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데이터가미는 데이터의 가공 및 시각화 툴을 제공하며, 현재 진행중인 베타 서비스에 이어 곧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다. 빅데이터의 시각화와 손쉬운 분석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타블로(Tableau)와 흡사한데, 케이런은 데이터가미가 기업에 타겟을 맞추거나 금융, 세일즈 등의 특정 분야만을 위한 툴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종이접기(Origami)에서 따온 서비스의 이름처럼, 기업이나 조직이 아닌 개개인도 손쉽게 데이터를 획득/가공/시각화함으로써 데이터에 기반을 둔 각종 동향 파악 및 체계적인 의사 결정이 일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 각종 수식이 난무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이나 현란한 엑셀 스킬이 없이도 누구나 데이터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이에 기반한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 멋지지 않은가?
▲유로화와 호주 달러 환율 데이터를 이용한 Datagami 데모화면
정말 철저하다, 싶을 만큼 관련 통계 자료를 엄청나게 끌어모은 Crossroads 보고서를 읽으면서 ‘대략 이렇겠지’라는 직감과 경험에 기반한 소통과 이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과 여기서 나오는 결과들이 과연 내실이 있는지에 대해 최근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참 반가운 스타트업을 만났다.
▲바운들스가 지난해 발표한 퍼스 스타트업 생태계 인포그래픽
마지막으로 빅데이터를 이용한 행동 분석 및 통계를 전문으로 하는 스타트업 바운들스(Boundlss)가 지난해 발표했던 퍼스 스타트업 생태계 인포그래픽 링크를 달아둔다. 지난번 보고서도 그랬지만, 이런 건 볼 때마다 대한민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이렇게 통계치와 함께 한 눈에 보이도록 정리한 게 있으면 참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못 찾고 있는건지, 아니면 이거 해주실 능력자분 어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