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지진이 선사한 익숙함
2016년 10월 10일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는 친구 덕에 지난달 중순 발생한 지진 상황을 생생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눈앞에서 흔들거리니 무섭고 비현실적이었어.” 집에 혼자 있던 그는 선반의 물건들이 떨어지는 동시에 강한 진동을 느끼고는 급히 뛰어나갔다. 그는 아파트 8층에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고 곧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몇 분 뒤 ‘긴급재난문자’라는 것을 받았는데, 내용은 더욱 황당했다.

국민안전처의 긴급 재난 문자

국민안전처의 긴급 재난 문자

지진 발생 후 10분이나 지나서야 발송된 문자의 내용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안전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그냥 ‘안전에 주의’하란다. 역시나 무릎을 치게 하는 대한민국 재난 대응 수준이다.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인데?

처음 겪는 일인데도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느끼는 때가 있다. 이런 현상을 '데자뷔'라 한다. 나는 이번 지진을 통해---대형 침몰 사고와 더불어---보안업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보 보안 사고들을 떠올렸다. 국가든 기업이든 위기가 닥쳤을 때의 책임감과 대응 수준이 하나같이 똑같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저렇게 무책임과 무대응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일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의 지진, 발전 없는 대응책

지진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므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국민안전처’는 그런 대처를 위한 조직이다. 국민안전처의 역할은 ‘재난안전관리시스템 구축을 통해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종합적이면서도 신속한 대응 및 수습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최근 이 조직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맡은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1의 지진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역대 4번째로 강한 지진이었지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더 큰 지진이 올지, 집에 있어도 되는 건지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규모 2.0~3.0 사이의 지진이 91차례나 계속 발생하자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동안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서버 폭주로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다운되었고, 긴급재난문자는 지진 발생 후 8분이 지난 후에야 발송되었다. 문자를 못 받은 사람도 천만 명이 넘었고,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15분 뒤 문자가 발송되었다. 이런 상황은 다음 날 13일 오전이 되어서야 정리되기 시작했다. 관계 장관들이 현장을 찾았고 기상청과 국민안전처의 늑장 대응에 대한 질책이 이어졌다. 정부통합전산센터는 국민안전처 홈페이지 처리 용량을 최대 80배까지 대폭 증설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뒤늦은 대응에 시민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특히 직접 지진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사고 당시의 좌절감을 상기시키며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19일 밤 경주에 또다시 진도 4.5의 강진이 발생했는데 안타깝게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국민안전처와 기상청 홈페이지는 또다시 먹통이 되었다. 긴급재난문자는 지진 발생 9분이 지난 뒤, 그것도 일부 지역에만 발송되었다. KBS는 버젓이 드라마를 방영해 재난 주관 방송사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국가 재난 대응 시스템, 이럴 바엔 없다고 하세요

시스템을 구축해도 제대로 작동하도록 준비된 매뉴얼과 훈련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이번 지진을 통해 국가 재난 대응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라는 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우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긴급재난문자’를 보자. 이것이 제때 발송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지진 경보 발송이 국민안전처를 거치는 구조 때문이다. 기상청은 26초 만에 통보했지만 국민안전처는 발송 지역 결정, 문구 작성, 통신사 전달 등에 10분에 가까운 엄청난 시간을 소모했다. 지진 피해가 없는 지역에 문자를 보내면 문제가 생길지 고민하느라 지연되었다는 해명은 어처구니없다. 이들에게는 재난 상황을 빨리 알리는 것보다도 질책에 대한 두려움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국민안전처 홈페이지 다운’도 마찬가지다. 홈페이지 트래픽 용량을 80배 이상 늘리겠다는 발표가 무색하게 홈페이지가 다시 다운되었는데, 실상 정부의 IT 이해도가 현저히 부족해 발생한 문제였다. 갑자기 폭증한 트래픽은 단순히 서버 용량 증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같이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일주일 만에 80배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래픽의 부하 분산을 돕는 서비스를 도입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제대로 된 부하 분산 처리 없이 단순히 서버를 증설하긴 했지만, 갑자기 증가한 트래픽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IT시스템의 구조와 흐름만 파악해도 쉽게 해결될 문제인데, 국정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것일까? 나의 세금이 이렇게 무능한 사람들에게 쓰이고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정부통합전산센터 직원들의 업무 평가를 국민에게 맡겨 정당한 조세제도를 구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또한, 기상청 매뉴얼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책임했다. <국가지진화산센터 운영 매뉴얼>에는 지진 발생 시 15분 이내에 지진분석 반장이 “기상청장·차장 전화 보고(필요시), 심야에는 가능한 다음날 또는 당일 아침에 전화 보고”하라는 지침이 포함돼 있다. 국민의 안전보다 장관님의 꿀잠이 우선인 희한한 매뉴얼이다.

흥미롭게도 국민안전처는 지난해 정부업무평가위원회에 제출한 자체 평가 보고서에서 스스로 아주 후한 점수를 줬다. 이들은 자체평가에서 121개 성과목표 중 4개 과제를 제외한 117개 과제를 100% 달성했다고 보고했고, 그중에는 지진방재체제 구축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안전처의 업무 평가는 출근 후 PC만 문제없이 잘 켜도 80점 정도는 나오는 것일까. 이제라도 국민안전처는 자체 업무 평가보다 명확하고 엄격한 전문 조직의 평가를 수용해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업무를 더욱 철저하게 관리해야만 한다.

국가는 부재중, 국민은 생존 D.I.Y

지지부진한 국가의 대응과는 달리 시민의 대응 수준은 일주일 동안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두 번째 지진 당시 승강기 갇힘 사고는 첫 강진 때보다 80% 이상 감소했고, 쇼핑몰과 영화관에서는 비상통로를 이용해 침착하게 대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6차선 도로에서는 차량 수백 대가 일렬로 멈춰 차를 세우고 공터로 대피했다. 경적을 울리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침착하고 명확한 시민 의식은 첫 지진 이후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행동 요령을 학습한 결과다.

또한, 각종 응급 물품과 비상식량이 갖춰진 ‘생존 가방’이라는 패키지 상품은 지진 직후 수요가 크게 늘었다.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지진희 알람’은 1분 만에 지진 경보 문자가 발송되어 긴급재난문자보다 빠른 것으로 유명해졌다. 더욱 상세하게 작성된 일본의 재난 대응 가이드를 공유하기도 한다. 국가가 일주일 내내 허둥거리는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 안전해지는 방법을 습득한 것이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국가가 신뢰를 잃은 곳에서 생존권은 셀프다. Do it Yourself!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큰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만들어졌고 경미한 지진에만 해당되는 매뉴얼이라 그런 것” 정부 관계자는 재난 대응 매뉴얼에 대해 질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변명했다. 그의 발언은 ‘지진을 한 번 겪어봐야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들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좀 무섭다. 국민안전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재난을 경험해야 제대로 된 ‘매뉴얼’ 하나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국가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임에도 스스로 재해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가정하고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더불어 강진에 대한 대응책은 애초부터 없었다. 모양새만 갖춘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돌아와, 보안 사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기업은 보안 솔루션을 도입할 때 법적 제재를 피하기 위한 규제 조건만을 겨우 충족하려고 든다. 구비한 보안 장비마저도 감사 기간에만 켜뒀다가 끝나면 꺼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왜일까? 기업들은 자신의 회사에 보안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솔루션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올해 발생한 기업 정보 유출 사고만 보아도 피해 기업 대부분이 값비싼 보안 장비와 개인정보보호 관련 국가 인증까지 구색을 모두 갖춘 상태였다. 각종 사고와 재난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고, 발생한다고 해도 막연한 미래로 생각했던 수많은 기업은 지금도 계속 정보 유출 사고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리스크 관리에 대한 기회비용을 아껴서는 안 된다. 사고에 대한 대비는 각종 변수를 고려해 준비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진도 5.8의 강진은 어쩌면 우리 사회 전반의 안일한 태도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클라우드브릭 칼럼니스트 박지원 (Kor) / Cloudbric Columnist Joey Song (Eng) / support@cloudbr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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