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상징적인 존재인 HP가 영국 소프트웨어 회사 Autonomy를 2011년 10월 무려 11조원에 인수한지 겨우 1년만에 9조원을 상각했습니다. 인수 당시 11조원 전액을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1년동안 그 중 9조원이 허공으로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HP 경영진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9조원 중 5조원은 Autonomy가 회계장부를 조작해서 인수가격을 부풀렸기 때문에 생긴 상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Autonomy의 전 CEO Mike Lynch가 왜 5조원인지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허튼 누명을 씌우지 말라고 반박하여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딜을 추진한 HP의 전 CEO Leo Apotheker는 SAP 출신으로, 하드웨어 사업을 완전히 버리고 소프트웨어 위주의 사업으로 거듭난 IBM의 transformation 방식을 HP에도 적용하기 위해 HP의 주력이었던 PC 사업 포기를 선언하고 Autonomy를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변화를 추진한 까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교체되었으며, ebay 출신의 새 CEO Meg Whitman은 PC 사업 철수를 번복하고 프린터 사업부와 합쳐 turnaround를 꾀하였으나, Autonomy 인수는 중단하지 않고 마무리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Oracle과 Dell도 Autonomy 인수를 고려하였으나 HP의 인수 가격인 11조원에 크게 못미치는 6조를 제시했음에도 “Over-priced” 되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HP 경영진의 판단 착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근거입니다. Autonomy의 연 순이익은 2천 5백억원 수준에 불과하며, 11조원을 회수하려면 미래가치로 환산하지 않아도 44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인수합병의 근본적인 목적이 시너지 창출을 통한 1+1=3이라고 해도 정당화하기 힘든 계산입니다.
HP는 결코 M&A 경험이 부족한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여태까지 인수합병에만 무려 35조원 이상을 퍼부었고, 상당수 1조원 이상의 대형 deal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내부적인 M&A 역량이 충분했고 PMI (Post-merger Integration, 인수합병 후 통합) 경험도 많았으리라 예상됩니다. 특히 이미 2001년 Compaq을 25조원에 인수한 경험이 있어, 이러한 대형 deal의 후속 처리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축적되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림 출저 : M&A History of HP)
하지만, 위와 같이 수많은 회사들을 인수했으나 회사를 보는 눈이나 통합하는 능력은 늘지 않은 것 같습니다. 9조원을 상각한 지 불과 3개월 전, 지난 8월에는 2008년에 14조원을 들여 인수한 EDS에 대해 역시 8조원을 상각한 바 있습니다. Palm 인수를 통한 모바일 시장 진입은 실패했고, 3par 인수는 살 생각이 애초에 없이 가격만 높이러 비딩했던 Dell에 속아 비싸게 주고 샀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번 Autonomy 인수 실패에 대한 원인 분석은 다양합니다. 애초에 너무 높은 가격으로 샀고, 설령 Target이 회계장부를 속였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대규모 상장사의 financial due diligence가 이렇게 허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수자의 책임이며, Autonomy 경영진 retention에 실패했기 떄문이기도 합니다. Investment bank에 너무 의존하여 인수 가격이 비싸졌다는 추측과, HP가 자랑하는 “HP Way”가 Autonomy사에 맞지 않았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전략과 deal이 따로 놀았다는 점입니다. 높은 인수 가격은 향후 Autonomy에 회사의 resource를 집중하여 주력 비즈니스로 성장시킨다는 가정에 의한 것이었는데, transformation을 중단하고 PC사업을 유지하면서 Autonomy에 resource를 투입할 유인이 사라졌습니다. 새 CEO가 취임하면서 전략을 수정하였으면 새 전략에 맞지 않는 deal은 중단했거나 Valuation에 대한 가정사항이 바뀌었기 때문에 최소한 인수 가격이라도 낮추었어야 하나 그대로 추진하면서 이미 실패가 예견되었던 것입니다.
영업권 상각을 바로 M&A의 실패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기존 중심 인력들이 퇴사하고 HP로부터 전폭적인 투자도 받지 못하는 Autonomy가 상각된 가치를 복구하고 성공적인 M&A 케이스로 기록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매출이 120조원에 달하는, M&A를 위한 resource와 경험이 모두 풍부한 공룡 HP도 이렇게 고전하는 것을 보면 ‘성공적인’ M&A deal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