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년 전 1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1,7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바 있었던 디자인 스타트업 팹(FAB)이 150억원대에 매각 협상 중이며, 가구 전문 큐레이션 서비스로 피벗한다는 소식이 화제다. 테크크런치는 지난 20일 보도를 통해, 팹과 PCH International의 150억원 규모의 매각에 대한 딜이 진행중임을 유력한 소식통을 통해 확보한 바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약 이번 딜이 성사된다면, 매각을 통해 확보한 150억원 규모의 자산은 팹이 피봇한 가구 전문 큐레이션 서비스 헴(HEM)으로 이전된다. 이번 글에서는 팹의 지난 4년을 간단히 돌아보며, 스타트업이 취해야 할 버티컬 전략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010년, 동성애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로 시작되다
2010년 Fabulis.com이란 이름의 동성애 커뮤니티를 위한 데이팅 서비스로 시작된 팹은, 당시만 해도 속옷이나 디자이너 가구를 팔던 스타트업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창업자인 쉘해머(Shellhammer)와 클린턴 정부에서 일했던 골드버그(Goldberg)가 프로젝트에 합류하며, 팹은 패션 큐레이션과 소셜 커머스를 결합한 저스트팹(JustFab)으로 변모하며 약 91억원대의 투자를 유치하고, 100만명의 회원을 유치하게 된다.
이후 아마존의 개인화 분석툴을 도입하고, 제품군을 가구 및 패션 제품뿐 아니라 스타일리쉬한 주방용품, 전자 제품, 여행 가방 및 보석등으로 확장하며, 12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매달 300만명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명실상부한 디자인 스타트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팹은 2013년에 중국의 텐센트(Tencent)와 실리콘밸리의 안데르센 호로위츠(Andereessen Horowitz)등으로 부터 1조 원의 회사가치를 인정 받으며, 1700억 원대의 투자를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팹은 불과 1년만에, 매월 140억원에 달하는 비용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직원 해고 및 피벗을 통해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로 전락했다.
FAB, 핵심역량을 잃고 서드 파티를 위한 물류회사로 전락하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팹의 트래픽을 이끌었던 핵심 요인은 패션 셀렙과 스타일리스트들이 디자인하고 엄선한 새로운 패션을 개인화하여 제공하며, 신속히 업데이트하는 '속도'에 있었다. 이에 대하여, 팹의 공동창업자인 골드버그는 "이는 소매점을 일년에 몇번씩, 새롭게 머천다이징하는 것과 같았다. 기존의 브랜드 혹은 상점의 스타일을 빠르게 교체해 나아갔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당시 팹은 내부에 자체 패션 브랜드와 디자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매달 “룩북(lookbook)”이라 부르는 새로운 컬렉션을 통해 가입자들에게 개인화된 디자인과 색상의 신발 6켤레, 또는 새 가방 7개를 제안하며, 패션 큐레이션 서비스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팹의 경영진들은 이 시점에서 추가로 투자를 유치하며, 제품의 영역을 주방 및 전자, 여행 용품등으로 확장해 나아가는 실수를 범했다. 지속적으로 재방문하는 고객들의 충성도를 높히고, 패션이라는 버티컬 영역에 집중하는 본질을 놓치고, 팹은 기존의 핵심역량과는 거리가 먼 물류 창고 확장, 배송 시간의 단축, 유럽 시장의 오프라인 진출과 같은 과제들을 새롭게 꺼내 놓으며 비용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후 팹에서 큐레이션되는 제품들은 초기의 기발함과 독특함, 과감함을 서서히 잃어갔다. 결국 팹은 서드파티를 위한 쇼룸으로 전락하며 회원수 및 방문자가 급감하게 된다.
헴(Hem)은 팹의 진화한 버전일까?
한편, 팹의 대표인 골드버그는 올해 '테크크런치디스럽트 런던' 컨퍼런스를 통해 "우리가 새롭게 피봇한 헴은 피난처가 아닌 팹의 진화한 버전이다. 우린 여전히 1조 원에 가까운 가치평가를 받으며 투자를 받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전자상거래의 새로운 혁신을 가져올 팹을 구성한 인적 자원에 투자한 것이다"라며 헴 서비스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헴은 스웨덴어로 집을 일컫는 말로, 팹이 인수한 유럽 기반의 수제 디자인 가구업체들의 제조 역량을 기반으로 가구 및 인테리어 제품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한다.
헴의 비전은, 원료 공급에서 판매 단계까지 수직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을 이룩하여, 패스트 패션이라는 트렌드를 이끌어낸 자라(Zara)의 공급망관리체계(Supply Chain Management)를 수제 가구의 영역에서, 구축하고 실현해 내는 것으로 추측된다. 자라는 전세계에서 온 직물을 본사의 방침에 따라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 밀집된 첨단 공장에서 재단과 염색을 한다. 각 상점에서 보내온 상품과 소비자 정보들은 실시간으로 종합되어 생산 매니저들이 어떤 제품을 얼마나 생산하고, 어디로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게 한다.
이러한 JIT(Just-in-time) 공정은 17개의 공장에서 이루어 지며, 여기서 적당한 크기로 재단 된 옷감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내의 400여개의 전문샵에서 옷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 뒤 다시 프레싱(Pressing), 라벨링(Labeling), 퀄리티 콘트롤(Quality control)의 공정을 거친 후 세계 각지로 나아가게 된다. 디자인이 완성된 후 배송 시점 까지의 모든 공정이 10-15일 안에 마무리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라는 재고를 창고에 쌓아두고 판매하는 일반적인 의류 판매 방식에서 벗어나, 소량 주문과 적시 운송, 유연한 도급 계약 등을 통해 무재고 시스템을 실현하였다.
헴 역시 팹을 운영하며 얻게 된 고객 정보와 개인화 서비스에 대한 노하우와 데이터 베이스를 기반으로, 수제 가구라는 버티컬 영역에서 제조 및 판매를 위한 수직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을 달성함으로서 비용대비 최대의 수익을 얻고자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팹이란 서비스가 단순한 서드파티 제품들의 쇼루밍 도구가 아닌, 제품 생산 및 유통의 영역까지 통합 할 수 있는 버티컬 영역을 선택하고 집중하고자 한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된다.
팹의 몰락이 던지는 시사점
하지만 매월 140억원대의 비용구조를 발생시키고, 수백명의 직원을 해고하는 기회비용을 치루고서야 이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는 점은 여전히 헴 경영진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게 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에서 시작하여, 창업 3년만에 1조원의 가치를 인정받은 후, 회사를 매각하고 다시금 수제 가구 큐레이션 및 판매 서비스로 피벗한 골더버그 CEO의 사례는 한국의 스타트업들에게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시사점을 던진다.
스타트업의 성장 전략은 수평적인 대기업 스타일의 문어발식 확장 전략이 아닌, 핵심 역량이 위치한 버티컬 영역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직적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일 수 있겠다. 두 번째는 비용구조의 효율화다. 팹은 실제로 회사의 브랜딩을 위해 뉴욕의 사무실 임차료로 매월 2억 5천만원을 사용했다고 하는 데, 필자는 이점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한 때 300여명에 이르던 직원은 이제 25명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비석세스의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지점은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 서비스로 시작한 팹 회사 문화의 DNA이다. 최근 애플 CEO 팀쿡이 '내가 게이라고 밝히는 이유'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게이라는 소수자의 정체성은 타인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하고, 우리 문화를 조금 더 관용적으로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섬세한 감수성과 감각은 회사의 디자인 및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차원에서도 유의미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들이 다시 디자인을 핵심 역량으로 하는 수제 가구 큐레이션 회사로 피봇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도 자신의 소명의식 혹은 DNA에 기반한 회사의 문화가 제품 개발 및 고객을 대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기반을 이루고 있는 지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논리에 기반한 설득의 행위가 아니라, 수천년의 진화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DNA에 깊숙히 새겨져 있는 보편성을 파악하고 이를 만족시키는 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