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25개 유수 벤처캐피털 중 하나인 '포메이션8(Formation8)'은 올해 두 번의 홈런을 쳤다. 투자했던 두 회사가 각각 인수되며 10배, 5배의 투자 수익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특히 가상 기기 헤드셋 업체인 '오큘러스 VR'은 마크 주커버그의 간택을 받아 2조 5천억에 인수되며 국내외에 포메이션8의 이름을 한 번 더 알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지능형 인맥 관리 솔루션인 '릴레이트아이큐(Relate IQ)' 역시 고객 관리계의 강자 '세일즈포스닷컴'에 4천 억에 인수되었다.
이처럼 타율 높은 벤처캐피털, 포메이션8의 설립자인 구본웅 대표에게는 늘 '재벌 3세', 'LS가의 장손'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구본웅 대표는 오히려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으면 하루종일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격식 없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재미(Fun)'를 인생철학으로 삼는 뼛속부터 벤처인인 그에게 지난 두 번의 인수 과정과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오큘러스 VR, 이렇게 잘 될 걸 알고 투자하신 건가요.
오큘러스 VR에 투자했을 때는 '넥스트 애플'에 투자하는 느낌이었어요. 세상을 바꾸는 딜이라고 생각했죠. 개인적으로 오큘러스 VR을 처음 써봤을 때, 교육 시장 판도를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큘러스 VR을 쓰는 것만으로 아이들이 순식간에 아프리카 땅 한복판 위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동물에 대해 공부할 수 있게 되는 식이죠. 이 가능성을 보고 좋은 글로벌 기업들이 이미 VR(가상현실) 작업을 하고 싶어 하거나, 하고 있는 추세였고 그 주도권을 저희가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오큘러스 VR에 투자하게 된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으시다면요.
사람들은 왜 컨수머 하드웨어 분야에 투자했느냐고 묻지만, 저희는 오큘러스가 단순 하드웨어가 아닌 또 하나의 새로운 플랫폼이라고 규정했어요. 오큘러스 팀은 첫 PT 때 우리가 디바이스로 먼저 시작하지만 결국 만들고 싶은 것은 안드로이드 같은 운영체제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하드웨어를 많이 판매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웹과 모바일을 잇는 또 하나의 새로운 플랫폼 시장을 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오큘러스는 가장 유능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모여있는 팀입니다. VR이 오랫동안 연구되었지만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인데요. 누군가 해결할 수 있다면 이 팀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 마크 주커버그와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오큘러스 VR을 인수하면서 '최고의 미래 플랫폼으로 일과 놀이, 소통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는 오큘러스에서 어떤 가능성을 본 걸까요.
주커버그는 오큘러스를 통해 현재의 페이스북을 2배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봤다고 생각해요. 현재 페이스북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통 방식을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거죠.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페이스북에 여러 가지 그룹이나 페이지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들이 이제 VR을 통해 전혀 다른 인터페이스로 가능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본 것 같아요.
- 페이스북이라면 오큘러스 VR과 비슷한 걸 직접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또 한가지 페이스북이 오큘러스를 좋아했던 이유는, 오큘러스 자체가 이미 하나의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앱 단위의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죠. 이미 회사가 플랫폼화되어 성장하고 있다면, 그 이상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건 어렵다는 점을 주커버그도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이런 혁신적인 플랫폼이 세상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고, 또 오큘러스 팀만이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이미 본인도 잘 알기 때문에 그 가치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인수를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 페이스북의 오큘러스 VR 인수 가격이 무려 2조 5천억 원입니다. 주커버그의 가장 비싼 장난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어요.
스타트업의 인수 금액으로만 생각한다면 큰 금액이지만, 그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그렇지만도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희 입장에서는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엑시트(Exit)하기 아까운 부분도 있었어요.(웃음) 요즘 좋은 회사들은 오히려 안 팔게 하는 게 어려워요. 페이스북이 잘 가져갔다고 생각했죠. 이번에 세일즈포스에 인수된 릴레이트아이큐도 마찬가지고요. 세일즈포스닷컴의 CEO도 참 스마트하다고 생각했어요.
작년 오큘러스 VR에 투자했었던 마크 앤드리센은 매번 직원 100명에게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에 누가 가장 천억 달러의 가치를 가진 회사에 근접하냐'는 내용의 설문을 진행하는데요. 압도적으로 오큘러스가 1위라고 해요.
- 자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엑시트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임팩트(impact)를 가지고 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페이스북이 제안한 것은 돈이 아닌 비즈니스 실행 계획(Execution plan)이었어요. 우리는 오큘러스를 이렇게 지원하고 싶고, 이것들이 1, 2년 안에 몇억명의 인구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비전을 말해줬어요. 그건 거절하기가 어렵죠.(웃음)
- 갑자기 궁금한 건데, 2조 5천억이라는 인수 금액의 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가요? 그냥 즉흥적으로 만나서 주커버그가 결정하는 식인가요.(웃음)
사실 투자 이야기를 나누는 시기에 게임 컨퍼런스가 있어서 오큘러스 팀이 너무 바빴어요. 주커버그가 초청했는데, '미안하다, 우리 좀 바쁘다'고 했죠.(웃음) 주커버그가 절대 시간 낭비 안 하게 할 테니 와달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물론 서로 가치를 따져보고 어느 정도가 적정 가격이라는 수준은 있겠지만, 직접 만나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숫자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200억 원의 가치를 가진 회사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 직접 만나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더 좋고 꼭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이상으로도 충분히 제시할 수 있어요. 숫자보다는 힘을 합쳐서 같이 하는게 훨씬 중요하다는 마인드죠.
- 한국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네요.
투자할 때도 한국은 매출 같은 수치 자료로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라고 해요. 반면 미국의 경우 그 기업이 보는 비전이 정말 확실하고 시장 판도를 흔들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투자와 그 규모가 결정돼죠. 증명의 단위가 틀려요. 인수 환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미국 기업들이 유망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들을 다 데려가고 있죠. 예를 들어 메신저가 중요한 시대가 되면 이미 페이스북이 왓츠앱을 가지고 있어요. 로봇팅이 중요한 시대가 오면 구글이 가지고 있고요. 국내 기업들은 세컨티어(second tier) 기업들만 인수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 다른 인터뷰에서 한국 벤처는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해 꿈을 작게 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직접 체감하는 국내 스타트업 분위기는 어떤가요.
포메이션8이 한국 스타트업에도 투자하기 위해 여러 팀을 만났는데요. 놀라운 것은 미국 스타트업에 비해 기술력이나 열정이나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서 VC에게 당당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질 못해요. 분명히 자기들이 그리고 있는 꿈은 큰데, 너무 허황되다고 평가될까봐 지레 겁먹는거죠. 예를 들어 미국 진출과 더불어 중국 진출도 지금 이 시점에 꼭 해야될 것 같은데 이야기를 못 꺼내요. 돈이 두 배는 더 드는 데다가 집중력이 없다는 비난을 들을까 봐서요.
몇 년 전과는 다르게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정말 좋은 팀들이 나오고 있어요. 희망적이지만, 그걸 뒷받침해주는 환경이 부족하죠. 일차적으로는 돈 문제예요. 만약 오큘러스 VR이 한국 회사였고, 글로벌 런칭할 계획이 있으니 3천 억자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다들 미쳤다고 하지 않았을까요.(웃음)
- 국내 스타트업들이 한국 내 투자, 인수 환경에 익숙해지다 보니 소극적인 태도가 습관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스타트업의 잘못은 아니예요. 다만 일정한 틀 안에 갇혀서 생각하는 태도는 좀 안타깝죠. 미국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돈은 어디에든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경우 돈, 대기업과의 경쟁 이런 것에 치여서 시장을 보고도 직전에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죠. 미국 스타트업은 오히려 거대 기업을 앞에 두고도 '엔지니어들이 합쳐서 한번 싸워보자'하는 배짱이 있거든요. 투자자들도 그런 걸 재밌어하고요.
그런데 국내 스타트업은 자신들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공격받을까 두려워해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저도 '여과없이 너의 생각을 이야기해라'라는 지적을 상당히 많이 받았어요. 미국 사람들은 오히려 '저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자기 생각을 굉장히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자신감 있는 태도들이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사실 에어비앤비도 거창한 아이디어가 아니예요.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고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이죠.
- '돈은 어디에든 있다'는 자신감있는 태도가, 실제로 갖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미국 스타트업은 오히려 VC들에게 물어요. '당신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나요'라고 말이죠. 이제는 VC들이 떵떵거리며 피칭을 받는 게 아니라 좋은 스타트업을 직접 찾아가는 분위기예요. 감히 오라고 할 수가 없죠.(웃음) 이제 너무 멋진 기업들과 아이디어들이 많기 때문에, 벤처 캐피털이 스스로를 피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환경입니다. VC들이 단체로 티를 맞춰 입고 가는 경우도 있어요.(웃음) 기념일 때 꽃도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기업을 놓치니까, 어떻게 해서든 마음에 들려고 하는 거죠.
한국 스타트업들에게도 '타이밍이 지금 왔으니 자신감을 갖고 도전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대기업, 정부, 시장도 걱정도 하지 말고요. 현재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예요. 동남아 같은 경우 한국 벤처들을 롤모델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미국만큼은 아니겠지만 '돈은 있다'고 생각하고 큰 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벤처 틀 안에 갇히지 말고 '대기업은 이미 지는 해,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포메이션 8의 향후 중장기적인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포메이션8은 벤처 펀드의 수익률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벤처가 결국에는 앞으로 산업과 기업의 근본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고 싶기 때문에, 저희는 벤처 캐피털의 틀 안에만 갇혀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뒤집을 엄청난 스타트업이 있다면, 대주주는 아니더라도 함께 어마어마한 콜라보레이션을 해보고 싶어요. 적극적으로 경영도 함께하고, 실질적인 성장을 함께해나갈 수 있도록요. 실제로 기존 벤처 캐피털이 가진 틀을 깨기 위해 현재 3,4개의 팀을 직접 인큐베이팅하고 있기도 합니다.
- 구본웅 대표님이 가진 인생과 비즈니스에 대한 철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철학은 '재미(Fun)'예요. 한국 정서에는 잘 안맞지만 사람이 솔직해야 하거든요. 하기 싫은 것은 결코 잘 할 수가 없어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하기 싫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달려들지를 못해요. 일이 되는 거죠. 지금도 만약 제가 너무 좋아하는 회사에 투자했다면,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매일매일 그 회사 생각뿐이고 어떻게 하면 더 도와줄 수 있을까만 궁리하게 되거든요.
스타트업도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정말 재밌고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그럼 자신감이 붙을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자신감은 거짓에서 나올 수가 없거든요. 한국 스타트업이 문화적인 틀을 깨고 자신감 있는 태도만 갖출 수 있다면, 거기에 실력과 열정이 더해져 얼마든지 세상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