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5일. 세계 각국에서 IT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beLAUNCH 2020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코엑스로 모이는 날이다. 7년 전 beLAUNCH 2013 때와 비교하면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엘론 머스크가 제안했던 '하이퍼 루프'가 구현돼 부산에 사는 사람들도 넉넉잡아 30분이면 삼성동 코엑스에 도착한다. beLAUNCH 참가자 전원에게 지급되는 무선 이어폰 모양의 조그만 기기는 실시간으로 거의 모든 언어의 통역을 지원한다. 특히 이 실시간 통역기는 연사자들 목소리의 높낮이나 악센트, 사투리에 대해 학습돼 있다. 7년 전에는 점심 식사가 도시락이었는데 위생이나 신선도 문제로 골치를 앓았었다. 지금은 '소일렌트(Soylent)'를 담은 텀블러와 생수 한 병을 나눠준다.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쓰레기도 줄일 수 있어 환경친화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그만이다. 얼핏 미숫가루처럼 생긴 이 대체식품은 수험생과 혼자 사는 직장인, 그리고 건강관리에 유별난 노인들에게 인기몰이 중이다. 참, 그러고 보니 소일렌트도 2013년부터 개발해온 거라고 하던데.
소일렌트는 Y Combinator 졸업생인 롭 라인하트(Rob Rhinhart)가 고안한 대체식품으로, 몸에 필요한 여러가지 화학가루(raw chemical powder)의 혼합물이다. 이 혼합물에는 비타민과 미네랄, 필수아미노산과 같은 다량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다. 정량의 소일렌트를 물에 타 마시면 별도의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 라인하트는 소일렌트가 싸고, 건강하고, 편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디폴트 식사(default meal)라고 말한다. 한 끼 분량 소일렌트의 가격은 약 3천 원($3.10)이다.
라인하트는 거동이 불편해 식사를 차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친척을 보고 소일렌트의 단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화학 가루에서든, 당근에서든 얻는 영양성분은 같지 않은가? 그럼 더 간단하고 효율적인 영양 섭취 방법은 없을까?'
영양학이나 화학에 학문적 배경이 없는 라인하트는 이때부터 자가 실험으로 화학 혼합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 때는 30일 동안 소일렌트만 마시며 육체상의 변화를 관찰하기도 했다. 현재 라인하트는 일주일에 두 세 번만 전통적인 음식(conventional meals)을 먹는다. 그에게 잘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 같은 레저 활동'이다.
라인하트는 소일렌트가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환경오염을 막고 건강 관리를 도우며, 나아가 개발도상국의 기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소일렌트는 아직 미국 식약청(FDA)의 검사를 받지 않았다. NSF가 인증한 설비와 FDA가 승인한 성분들만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직 안전성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다.
워싱턴 포스트는 관련 기사에서 소일렌트만으로 평생 건강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전문 의약회사의 유사 제품*을 선택하도록 해라(real medical food from Abbott or Nestlé is the way to go)'라고 말하고 있다. 영양‧식이요법학회(Academy of Nutrition and Dietetics)의 대변인인 Joy Dubost는 타임지에서 소일렌트의 성분 구성이 영양적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회의 속에서도 소일렌트에 대한 호기심은 사그라지지 않은 듯 하다. 지난 달 소일렌트는 약 11억 원에 달하는 선 주문을 받았다. 이달 말 14만여 개의 소일렌트가 미국 각지의 선 주문자들에게 발송될 것이다.
화학 물질로 육체의 기본 수요를 충족시키고, 전통적인 식사는 완전히 문화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 과연 7년 뒤 나의 모습이 되어 있을지. 또 식문화가 바뀐 미래의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지 두고 볼 일이다.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써 있는 문구처럼, 미래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Abbott Nutrition, NestléHealthScience 과 같은 의약회사에서는 환자들을 위한 의료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 식품들은 의사의 감독아래 사용하도록 권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