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돌아갈래, 설경구가 돌아왔다
기차가 달립니다. 영호는 선로 위에 서 있습니다. 다급히 경적을 울리지만 물러나지 않습니다. 돌진하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영호는 말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박하사탕>(2000, 김영호 역)의 시간을 거꾸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기라도 한 걸까요. 설경구가 돌아왔습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한재호 역)과 <살인자의 기억법>(2017, 김병수 역)의 설경구는 더이상 강철중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어떤 이전의 설경구도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설경구였습니다. '아 참, 우리나라 영화계에 설경구라는 명배우가 있었지.' 두 영화를 본 2017년의 관객은 그렇게 설경구를 다시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계에 설경구만큼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송강호 정도가 있을까요. 설경구는 선언이라도 하듯 2000년 1월 1일 <박하사탕>으로 영화계에 나타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미 연극무대에서 전무후무한 1천 회 공연 기록(지하철 1호선)을 세운 바 있던 그였기에 영화계는 설경구의 자리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계는 설경구의 무대였습니다.
<공공의 적>(2002, 강철중 역)의 강철중은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캐릭터 중 하나가 됐습니다. 경찰들 사이에서 "강철중은 경찰보다 더 경찰 같더라"는 평을 들으며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의 주연과 대상을 싹쓸이합니다. 2000년부터 3년간 4개의 신인남우상과 10개의 남우주연상을 쓸어 담습니다. 시상식장에서 "죄송하다"고 수상소감을 말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다음 해엔 <실미도>(2003, 강인찬 역)로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배우로 등극했습니다. <광복절특사>(2002, 유재필 역) 같은 코미디와 <역도산>(2004, 역도산 역) 같은 일본어 연기까지, 정극 코미디 멜로 액션 할 것 없이 다양한 영화의 다양한 연기를 다 압도적으로 잘 해냅니다.
설경구를 극복한 설경구
그런 설경구에게도 정체기가 옵니다. 연기 자체는 여전히 훌륭했습니다. 배우로서의 노력도 한결같았습니다. 다만 설경구라는 배우의 색이 너무 짙은 게 문제였습니다. 어떤 역을 해도 '설경구가 연기하는 누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자기 색이 선명한 배우였고 동시에 늘 지독히 노력하는 완벽주의자였던 탓인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의 노력을 통해 자기 안으로부터 구축한 캐릭터로 연기하는 그였기에 결과물이 크게 다르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대중적 인기를 가져다준 공공의 적 강철중이라는 캐릭터가 역으로 대중에게 피로감을 주었던 게 컸습니다. <공공의 적 2>(2005)와 <강철중: 공공의 적 1-1>(2008)이라는 선택은 지금 돌아보면 패착이었습니다. 이후 <용서는 없다>(2009, 강민호 역), <감시자들>(2013, 황반장 역) 등 여러 작품을 내놓았지만, 관객이 본 건 언제나 '그 설경구'였습니다.
방심하고 있는 우릴 깜짝 놀라게 한 건 <불한당>의 한재호였습니다. 핏이 세련된 쓰리피스 수트를 차려입고 포마드로 말끔히 머리를 올려 넘긴 한 설경구는 무려, 섹시했습니다. 설경구와 임시완의 블랙핑크빛 브로맨스라니.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2~30대 젊은 여성 팬들은 이 '섹시한 중년배우'를 '꾸'나 '설탕'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팬레터와 선물 조공을 보냅니다. 팬카페가 다시 열리고, 촬영장에 밥차가 옵니다. 급기야 아이돌이나 오르는 강남역 광고 스크린에 그의 사진이 걸립니다. (경구는 멍도 참 예쁘게 든다...) 갑작스러운 팬덤에 설경구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역시나 기쁘고 감사해 합니다. 매번 팬카페와 디시인사이드 설경구갤러리에 직접 들어가 인증샷과 함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고 합니다. 한 인터뷰에선 팬이 선물한 티셔츠를 입고 와 "요즘 주변 사람들이 고목나무에 꽃 폈다고 놀린다"고 말했다 합니다. 설경구는 지금 연기 인생 2막을 열었습니다.
정체기라 느낀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10년이 넘는 침체기 동안 설경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쩌면 스스로도 혹시 나의 재능이 여기까지인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마치 자신을 벌하듯, 침체기 동안 여러 영화에서 육체를 혹사한 건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기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테니까요. 설경구가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빛을 본 이유는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다 내려놓고서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불한당>과 <살인자의 기억법>에 관한 인터뷰들을 보면 설경구가 늘 말하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매너리즘', '안 해본 연기',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걱정', '모험을 했다' 등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살인자의 기억법> 때부터였어요. 임하는 자세부터 달랐어요. 내가 뭔가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 텀이 있더라도 '변화에 대한 노력을 내가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었어요. 내가 뭔가 더 고민하지 않으면 이 정글 같은 곳에서 살아남지 못하겠다, 나만 정체되겠다 생각이 든 거죠.-뉴스엔 인터뷰 中
불한당은 <살인자의 기억법> 촬영이 끝나고 나서 바뀐 마음가짐으로 만난 첫 영화예요. 감독님, 스태프 다 젊고 패기 넘치는 현장이었죠.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제게 엄청난 자극을 줬어요. 이 나이에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배우로서 계속 새롭고 싶어요. 그래서 <박하사탕>이나 <공공의 적>처럼 관객들이 계속 기억해주는 캐릭터를 매 작품 남기겠다는 욕심이 있어요. 다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싱글리스트 인터뷰 中
어쩌면 자기 한계를 규정짓는 건 자기 자신뿐일 수 있습니다. 한계란 건 애초에 없는 걸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롭게 공부하면 새로운 아웃풋은 반드시 나오게 마련입니다.
스타트업을 하면서도 매일 주어진 일만 반복하면 필연적으로 정체기가 옵니다. 번아웃과 함께 오는 2~3년 차에 특히 그렇죠. 스타트업 구성원의 성장 속도가 빠른 건 더 효율이 좋은 일, 더 재밌는 일을 스스로 찾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지금 정체기라 느낀다면 이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더 재밌는 일, 아직 안 해본 일에 도전해보세요. 2막이 열릴지 모릅니다.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 상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