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은 좋은 놈인가, 나쁜 놈인가, 이상한 놈인가
여러모로 이병헌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자신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박창이 역)처럼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계에서 배우 이병헌은 흥행을 가져다주는 '좋은 놈'입니다. 반면 알려진 사건의 전말처럼 사실 좀 '나쁜 놈'이기도 합니다. 최고와 최악이, 우아함과 경박함이 뒤섞여있다는 점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이상한 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병헌의 좋고 나쁨을 논외로,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이병헌은 일단 '대체 불가능한 놈'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매장당하고도 남을 일화를 남겼지만, 이병헌은 그 어떤 눈물 기자회견도, 자숙의 시간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저 영화배우로서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안상구를 구한 이병헌, 이병헌을 구한 안상구
'창피함은 나의 몫인 로맨틱에 대한 과욕이 부른 그 사건' 후 미세먼지가 될 정도로 까이던 이병헌을 일으킨 건 <내부자들>(2015, 안상구 역)이었습니다. 오른손이 잘리고서 남은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호로록 라면을 끓여 먹는 안상구를 볼 때 관객은 알았습니다. '아.. 이병헌은 사람으로서는 미워할 수 있어도 배우로서 미워하긴 어렵겠구나' 하고 말이죠. 안상구는 이병헌 스스로 구축한 인물입니다. 영화촬영 초반 이병헌은 우민호 감독에게 "안상구를 쉬어가는 캐릭터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와 달리 안상구를 인간적이고 코믹한 캐릭터로 새로 잡았습니다. 안이 비치는 모텔 화장실 시퀀스나, 그 유명한 대사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도 이병헌의 제안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구축된 캐릭터 안상구가 '사건'의 여파로 흥행을 노심초사하고 있던 스탭에게 자그마치 920만 명의 관객을 선사했습니다. 우민호 감독은 “이병헌 그 자체가 영화의 미장센이 됐다”고 극찬합니다. 재밌게도 안상구라는 캐릭터가 하필 또 '나쁘지만 멋진 놈'이어서 이 한방으로 이병헌은 상당한 입지 회복에 성공합니다.
이어 이병헌은 국내영화 <밀정>(2016, 정채산 역)과 <마스터>(2016, 진현필 역), 할리우드의 <미스컨덕트>(Misconduct, 2016)와 <매그니피센트 7>(The Magnificent Seven, 2016, 빌리 락스 역)로 스크린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합니다. 대작들뿐 아니라 신인 감독의 영화 <싱글라이더>(2017, 강재훈 역)까지 영화판을 넓게 오갔고, 매번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씩 영화가 개봉될수록 이병헌의 이미지는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최근작 <남한산성>(2017, 최명길 역)에서도 역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병헌은 제대로 된 연기와 제대로 된 액션이 동시에 되는 배우입니다. 불안한 눈빛도, 확신에 찬 눈빛도 담고 있습니다. 왕도 어울리고 깡패도 어울리며, 멜로도 가슴 시리게 잘하고 코미디도 자지러지게 잘합니다. 사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광해군/하선 역)에서 근엄한 왕의 목소리를 내다가도 금세 돌아서서 똥개그를 하는 그를 봤을 때부터 사람들은 이 배우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연기력에 더해 국내는 물론 한류까지 섭렵하는 티켓파워도 갖췄습니다. 대사전달력이 탁월한 만큼 영어 발음이 좋아 헐리웃에서도 통합니다. 연기도 되고 영어도 되는 이병헌은 할리우드에서도 환영받으며 <지아이조>(G.I. Joe, 2013, 스톰 쉐도우 역)시리즈와 <레드: 더 레전드>(RED 2, 2013, 한조배 역) 등을 거치며 눈도장을 찍습니다. "메탈은 가장 완벽한 물질"이라 단언하던 그는 급기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Terminator Genisys, 2015, T-1000 역)의 T-1000역을 맡으며 그 스스로 메탈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할리우드의 명배우들과도 합을 맞추고 아카데미 시상자로 무대에 서는 월드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이병헌 같은 배우는 이병헌뿐입니다.
단언컨대, 가장 좋은 생존법은 대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스타트업이 살아남는 방법'과 '스타트업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뭘까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습니다. 제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 분야에서 나만큼 할 사람이 없다면, 그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되면 뭐든 불안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영화판에선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병헌의 인성 논란은 데뷔 초부터 끊인 적이 없습니다. '로맨틱 사건' 이전에도 나이트클럽 폭행 사건, 교제하던 캐나다 여성과 전 야구선수 강병규가 얽힌 상습도박 혐의, 그 외 여성이 얽힌 업계 비화들이 잊을 만 하면 나왔습니다. 이병헌이 그저 그런 배우였다면 일찍이 증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병헌 말고는 '이병헌이 하면 좋을 만한 역'을 할만한 사람이 우리나라 영화계에 없었습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의 서인우와 <달콤한 인생>의 선우를 떠올릴 때, 이병헌의 눈빛이 그곳에 없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쓰리, 몬스터와>와 <악마를 보았다>의 독기 선 눈빛도 마찬가집니다. 이병헌이 없다면 누가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왕과 광대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었을지 저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배우에게 쉼 없는 치열함 없이 성공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
배우로서 성공한 후 이병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도 수모와 열등감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1991년 KBS 공채로 데뷔한 이병헌은 TV 드라마 <아스팔트 내 고향>을 찍으며 정을영 감독에게 지독한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병헌의 연기력을 탐탁지 않아 한 감독은 매일같이 촬영장에서 이병헌을 자괴감에 빠뜨렸습니다. 어떤 날은 모든 스태프 앞에서 "이 작품은 나의 데뷔작이자 은퇴작이다"라는 말을 복창하도록 강요했다고 하네요. 훗날 이병헌은 이때를 회상하며 "정말 그렇게 은퇴할 수는 없으니 항상 목숨 걸고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영화계 입문도 사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차츰 자신의 재능을 다루는 법을 배우며 TV 드라마에선 하이틴스타로 대접받던 이병헌이었지만 영화만 찍었다 하면 참패하길 반복합니다.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1995) 등 90년대 말 여러 영화의 주연을 맡았지만 도통 관객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작품 중 그나마 알려진 것은 <내 마음의 풍금>인데 이 영화도 고작 15만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자연히 영화계에서 이병헌의 평가는 박해집니다.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암울한 세기말을 보낸 이병헌은 2000년 새해가 되어서야 마침내 영화배우로서 성공을 거둡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수혁 역)였습니다. 580만 관객이 들며 이때부터 이병헌의 가치도 재평가를 받습니다.
누가 뭐래도 실력을 쌓으면 #대체불가능 #생존 #성공적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은 강력한 전략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내 일을 남들보다 잘해야 합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잘해야 합니다. 그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누구라도 아픔과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의 반복 없이 그런 실력을 갖출 순 없습니다. 영화계에서 쓴맛을 보던 90년대 말 이병헌은 암울했습니다. 연이은 흥행참패에 설상가상 SBS와의 전속계약 불이행 분쟁,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한 무리한 스케줄까지 얹혀있었습니다. 공황장애와 심한 우울증으로 약 없이는 하루를 버텨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때 이병헌의 심적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 후 이병헌은 시간만 나면 극장에 몰래 가서 혼자 이 영화를 수도 없이 봤다고 합니다. 숱한 실패 끝에 찾아온 성공이 정말 너무 기뻐서 시간만 나면 극장에 가서 보고 또 봤다고, 백 번 가까이 봤다고 합니다.
영화 외적인 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킨 건 이병헌 자신이었습니다. 대체 불가능한 배우는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병헌에게도 최악의 시기가 있었고, 지독한 노력과 극복이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들이 인성으로는 욕할 수 있어도 연기로는 욕할 수 없는 지금의 이병헌을 쌓아 올렸습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아니, 최소한 대체 가능한 사람을 찾기 무지막지하게 어려울 정도의 실력을 쌓기. 단언컨대, 이것은 가장 완벽한 생존전략입니다. 그러기 위한 방법은 진부하게도 노오력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또 결국 노오력이라니 어떻게 매번 결론이 이렇게 뻔한지 저의 창의력 부족이 속상하고 참 허탈함에 기가 찹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봐도 별다른 수가 없네요. 대신에 그렇게 노오력해서 이병헌처럼 대체 불가능한 정도가 되면 그땐 저도 좀 개차반으로 살.... 아 이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