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너무 많이 들어 이젠 음성지원까지 되는 초코파이 광고의 CM 송이죠. 사람들 사이에 정(情)이 오가면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한다는 생각이 녹아있습니다.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통 과정 속엔 말 너머의 정서 교류가 있습니다. '정' 같은 추상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죠.
잠깐. 저한테도 초코파이 광고 아이디어가 하나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기승정결'이 컨셉입니다. 전이 아닌 정(情)입니다. 불같이 싸워도 정 때문에 화해하고, 정이 오가면 결국 일이 풀립니다. 자주 봐서 '정' 들면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이걸 몽타주로 보여주며 자막을 깝니다. 마지막엔 다시 "우리는 기승정(情)결' 문구를 띄워주며 마무리. 어떤가요? 오리온 지금 보고 있습니까?
아니 잠깐.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딴 길로 샐 뻔했네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저 카피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과연 알까요?
영화 <달콤한 인생>을 '소통'의 측면에서 보면 답답함 그 자체입니다. 진짜 답 안나오는 조직입니다. 선우(이병헌)와 강사장(김영철)의 대화를 듣다 보면 목에 고구마가 걸리는 것 같습니다. 소통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두 사람은 끝내 자존심 싸움만 반복하다 조직을 무너뜨리고 말죠. 선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대사들을 유심히 보니 이렇네요.
(화장실 거울을 보며 혼잣말)
"왜 이렇게 됐지? ...괜찮아."
-민기: "어떡하실 거예요?"
-선우: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끝까지 한번 가보려고."
-문석: "야 김 실장! 너 나한테 이래도 되냐?"
-선우: "너한텐 그래도 돼."
-오무성: "사과해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했음. 이 네 마디야. 네 마디만 하면 적어도 끔찍한 일은 피할 수 있다. 잘.못.했.음. 딱 이 네 마디다."
-선우: "그.냥.가.라."
선우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목적은 대화가 아닙니다. 이기기 위함입니다. 대화보다 자존심을 지키는 게 목적입니다. 애초에 상대의 생각은 궁금하지도 않기에 자기 자존심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사실상 듣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선우의 이런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공사장 시퀀스입니다.
생매장의 위협에서 건져 올려진 선우에게 문석(김뢰하)은 검은 가방을 던집니다. 안엔 휴대폰이 들어있습니다. 강 사장이 기회를 준 것이죠. 이제라도 용서를 빌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선우는 그 휴대폰을 무기로 사용하는 선택을 합니다. 강 사장과 통화한 척 연기를 하다가 다가오는 문석의 목을 휴대폰 끝으로 찍어버린 것이죠. 선우는 소통의 도구를 손에 쥐고도 자존심을 택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였는데도 말이죠.
그런 선우를 상대하는 강 사장도 말 안 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선우랑 아주 똑같습니다. 실제로 영화엔 선우와 강 사장이 일종의 '거울상'임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선우가 팔에 붕대를 감은 시퀀스 후에, 강 사장도 똑같이 붕대를 감고 등장하는 식입니다. "끝까지 가보는 거야." 두 사람 모두 어떤 선언처럼 이 말을 뱉습니다. 이번엔 강 사장의 대사들을 보겠습니다.
"조직이란 게 뭡니까? 가족이란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되는 거죠."
"제가 사람을 잘못 봤던 것 같습니다. 이젠 그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요."
-선우: "나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강 사장: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아주 그냥 둘이 똑같습니다. 소통의 기회가 주어져도 쓸데없는 말만 합니다. 그놈의 자존심, 대체 그게 뭐길래 이럴까요. 너무 강한 자존심은 결국 나르시즘입니다. 둘은 소통 대신 서로의 나르시즘을 겨뤘습니다. 두 사람은 싸움이 커지는 동안 몇 번이나 해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허나 번번이 자존심 때문에 소통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전쟁으로 잘 나가던 조직은 박살 나고 말았습니다.
조직 내에서 불만이 생기면 어쨌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소통을 피하고 쌓아두면 불만은 암세포처럼 자라납니다. 그런 불만의 대부분은 오해에서 비롯되죠. 일단 차분히 대화를 해보면 대부분 오해였음을 알게 되고, 생각보다 쉽게 마음이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자존심 내려놓고, 눈치 게임 하지 말고 말이죠.
반대로 어느 유효기간 내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립니다. 곧 전쟁이 시작됩니다. 영화에선 총이 있어 총격전이었지만, 현실에선 총성 없는 전쟁이 옵니다. 그 전쟁 속에서 주변 사람들이 다치게 됩니다. 전쟁이 커지면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조직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죠. 다시, 이 영화의 도입부 대사는 이랬습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내레이션)
무릇,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큰 문제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절대 안 맞는 사람이어서도 아니며 소통하지 않고 오해를 쌓아두기 때문입니다. 지금 팀원들 사이가 안 좋다면, 제품을 잘 만드는 것보다, 사용자를 모으는 것보다 제대로 된 소통으로 오해를 푸는 일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요.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영화 이미지 ⓒ 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