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개발 책 중에 제목이 가장 좋은 책은 단연 <자바스크립트 닌자 비급>입니다. 원제는 <Secrets of the JavaScript ninja>죠. 원제도 번역도 센스 만점입니다. 레전드 개발자 존 레식John Resig 형의 이 책은 뭔가 엄청난 것을 은밀하고 신속하게 알려줄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비법서'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결이 뭐였을까, 성공한 스타트업이 쓴 책을 들여다봅니다.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고, 페이스북에 올라온 노하우를 타임라인에 공유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딘가 '스타트업 닌자 비급' 같은 게 숨어있을 것 같아 이런저런 책과 정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의천도룡기가 아니었고 저는 장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구양신공을 발견해 순식간에 고수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의천도룡기를 아신다면 당신은 아-재).
애니메이션 영화 <쿵푸팬더>(Kung Fu Panda, 2008)에도 비법서가 등장합니다. '용의 문서'죠. 보고 나면 우주의 기운을 읽고, 나비의 날갯짓 소리까지 듣게 되며, 동굴 안에서도 빛을 볼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 문서는 오직 선택받은 단 한 사람, '용의 전사'만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포는 정말 얼떨결에 용의 전사로 지목받습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포는 그저 만두를 특히 좋아하고 '무적의 5인방'을 동경하던 동네 국숫집의 살찐 팬더였기 때문입니다. 5인방과 시푸 사부는 어이가 없습니다. 저 동네 팬더가 용의 전사라니! 아무리 우그웨이 대사부의 선택이라 해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 살찐 팬더를 국숫집으로 돌려보낼까 사부는 생각하지만, 곧 체념하고 포를 수련시킵니다. 강적 타이렁이 조만간 용의 문서를 빼앗기 위해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사부는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동속도 시속 30cm, 키 120cm, 몸무게 160kg의 저 국숫집 팬더를 용의 전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포를 수련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은 '음식'이라는 사실을 사부는 깨닫습니다. 미련해 빠진 포가 3m 높이에서 완벽한 가랑이 찢기 자세로 천장에 숨겨놓은 쿠키를 훔쳐먹고 있는 걸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사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5인방용 수련법은 애초에 너한테 안 먹히는 거였어." 사부는 말합니다. "수련에 통과하면 실컷 먹게 해줄게." 모락모락 김나는 만두 한 판을 포의 눈앞에 내밀 때, 사부는 왼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회심의 나이키 웃음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합니다. 포가 수련을 마치기도 전에 타이렁이 벌써 와버린 것이었습니다. 5인방이 떼로 덤벼봤지만, 무참히 패하고 맙니다. 이제 남은 희망은 국숫집 팬더 뿐입니다. 드디어 용의 문서를 펼쳐볼 시간이 왔습니다. 과연 어떤 무공일까, 얼마나 놀라운 비법서일까. 모두들 내용을 궁금해합니다.
백지였습니다. 용의 문서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비법서는 없었습니다. 5인방은 절망합니다. 사부는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자신이 혼자 남아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걷던 포는 아버지와 마주칩니다. 그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국수의 비밀 비법을 듣게 됩니다. 아버지가 밝힌 비법재료는 'Nothing'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법이란 없단다.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하다고 믿으면 특별해지는 거야.
다음날 마을을 다시 찾은 타이렁을 포는 맨몸으로 맞이합니다. 놀랍게도 타이렁과 포의 합이 맞습니다. 한 입이라도 먹으려고 사부의 혹독한 수련을 버텨낸 성과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었습니다. 용의 문서와 아버지로부터의 교훈으로 포는 스스로 깨어났습니다. 자기 장점을 살린 자신만의 권법을 구사합니다. 타이렁의 신경마비권법을 포는 두툼한 똥배로 방어합니다. 살의 반동으로 인해 공격은 오히려 타이렁에게 되돌아갑니다. 궁지에 몰린 타이렁은 분노합니다. "넌 날 못 이겨. 넌 살찐 팬더일 뿐이야."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내지르며 포에게 돌진합니다. 그런 타이렁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전 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그냥 살찐 팬더가 아니야. 난 특별한 살찐 팬더야.
'비법서'는 환상인 것 같습니다. 시중엔 성공한 스타트업들의 스토리를 담은 책이 많습니다. 업계 선배들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의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용의 문서'가 될 순 없습니다. 그저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우리 스타트업에 똑같이 적용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두에겐 각자의 권법이 있고 또 각자의 수련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호랑이 타이그리스가 호권을 연마하고 사마귀 멘티스가 당랑권을 수련한 것처럼, 자신의 장점을 발전시켜나갈 때 우리의 내공은 쌓이는 것 같네요. (편집자주: 용의 문서 곧 출시 임박)
'특별한 어떤 것은 모두에게 있다.' 영화는 말했습니다. 그걸 스스로 깨워야 한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쿵푸 판다 포처럼 자신의 특별함을 깨우칠 자기 길을 파다 보면 조금씩 내공이 쌓이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영화 이미지 ⓒ Paramount Pic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