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52. 로건 – 뉴비가 없으면
2017년 03월 31일

로건

*스포일러 있습니다.

예고편부터 심상치 않았죠. <로건>의 티저 예고편에선 "오늘 난 나에게 상처를 냈소"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조니 캐쉬의 'Hurt'가 흘러나왔습니다. 이 곡은 조니 캐쉬가 사망 직전에 낸 유작이었습니다. 이 쓸쓸한 곡을 배경으로 비친 울버린과 자비에 교수의 낯선 모습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카메라는 흉터 가득 엉망이 된 몸으로 손을 덜덜 떠는 울버린.. 아니 로건을 비춥니다. 자비에 교수는 초췌한 몰골로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엑스맨과는 뭔가 다른 얘기를 하려는구나, 관객은 예고편을 보고 짐작했습니다. 호기심은 기대로 이어졌습니다. 영상은 순식간에 수천만 조회를 넘겼습니다. 엠파이어는 2016년 최고의 예고편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죠.

로건

과연, <로건>의 이야기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이토록 우아한 마무리라니.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듯,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온 한 캐릭터와 그걸 연기해온 배우에게 예의를 갖췄습니다. <로건>은 무려 17년이나 울버린을 연기해온 휴 잭맨의 마지막 엑스맨 작품입니다.

그간 엑스맨 시리즈 전편에 출연하며 늘 한결같은 울버린을 보여준 그였죠. 마블 제작진과 휴 잭맨 스스로는 그 울버린에게 이토록 우아한 마무리를 선사하며 '휴 잭맨의 울버린'을 완결지었습니다. 의롭고 외로운 남자 (로)건이 형이 보낸 270년의 고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의 가슴에 묻혔습니다.

로건

영화의 배경은 2029년입니다. 더는 돌연변이가 태어나지 않은 지도 벌써 30년이 됐습니다. 엑스맨들의 정신적 지주이던 자비에 교수는 퇴행성 정신질환, 쉽게 말해 치매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통제력을 잃은 그의 뇌는 대량파괴 무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제때 약을 먹지 못해서 발작이 일어나면 정신감응 능력이 폭주해 주변 모든 사람을 멈춰버립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굳어버리기에 생명이 위험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된다는 걸 배우기 위해 치른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과거 자비에 교수의 발작이 처음 일어났던 날, 다른 모든 엑스맨들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상식 밖의 자가치유력이 있는 로건만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죠. 그동안 정부는 몰래 시리얼에 돌연변이 억제제를 타서 더는 돌연변이가 태어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로건

이제 엑스맨은 둘뿐입니다. 외로이 남은 로건은 리무진 드라이버로 일하면서 병든 자비에 교수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건 역시 예전의 그 울버린은 아닙니다. 몸속의 아다만티움이 독성을 일으켜 치유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어디서 다쳤는지 다리를 절뚝이며, 흰 머리에 주름 가득한 얼굴로 묵묵히 핸들을 돌리며, 그렇게 쓸쓸하게 살아갑니다.

영화의 '빌런'은 울버린 그 자신입니다. 유전자조작을 통해 전성기 시절 울버린을 복제한 'X24'죠. 이 캐릭터는 원작 코믹스엔 없는 이 영화만의 설정입니다. 자비에 교수와 로건은 이 X24에 의해 죽음을 맞습니다. 로건의 생을 거둔 죽음의 집행자가 울버린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설정은 생각해볼 만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내내 로건은 젊은 시절 자신이 저지른 살인들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아다만티움 총알 한 발을 주머니에 품고 다니며 그 지난한 삶을 이제는 내려놓을까 고민합니다.

로건

젊어서 그가 해친 많은 사람들처럼, 아이들을 구하려다 로건은 X24의 클로(claw, 갈고리 모양의 무기)에 의해 죽음에 이릅니다. 젊은 자신의 모습을 한 손에 말이죠. 자신의 업보가 돌아온 순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로소 동시에 원죄가 풀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어 그 X24를 해치운 건 유전자복제를 통해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로라(X23)였습니다. 울버린 클로의 원천이기도 한 그 아다만티움 총알로, 로라는 로건의 복수를 합니다.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순간이자 원죄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로건을 땅에 묻은 로라는 울면서 무덤의 십자가(+)를 엑스(x) 모양으로 돌려놓고 떠납니다.

우아한 마무리이자 천의무봉(天衣無縫, 하늘의 직녀가 짜 입은 옷은 솔기가 없다는 뜻)이라는 말을 꺼내고 싶을 만큼 완벽한 세대교체였습니다. 이제 마블의 히어로 영화들은 이 정도 깊이의 서사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로건>은 히어로 영화로선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었습니다. '작품'이라는 걸 인정한 것이죠.

로건

건이 형은 이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는데. 주변에 동료가 너무 없었습니다. 건이 형이 쓸쓸한 죽음을 맞은 건 제때 새로운 팀원이 충원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건이 형과 자비에 교수는 누구보다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뛰어난 능력과 살신성인의 멘탈까지 겸비한 이들은 새로운 동료가 나타났다면 그 누구와도 다시 팀 빌딩을 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리더쉽도 더는 새로운 돌연변이가 나타나질 않자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이 바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돌연변이 집단(!)인 스타트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계속 잘 되려면 적시에 새로운 인재가 충원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멤버보다 더 뛰어난 장점을 가진 사람을 영입할 수 있어야 빠르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팀 전체의 사기가 끌어 오릅니다. 개인적, 집단적 번아웃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뛰어난 인재의 출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죠.

로건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열정도 없습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필요한 시점에 새로운 인재가 충원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롤(role)의 세대교체와 업무의 세분화가 점차 이뤄지지 않으면 번아웃은 반드시 옵니다. 주변에 뛰어난 동료들이 있고, ‘자비에 영재스쿨’이라는 인재양성체계를 통해 꾸준히 새 인재가 충원되던 과거의 엑스맨은 탄탄했습니다. 새 인재가 더는 충원되지 못한 2029년. 로건의 그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영화 이미지 ⓒ 20th Century Fox

김상천 coo@slogup.com 슬로그업의 영화 좋아하는 마케터. 창업분야 베스트셀러 '스타트업하고 앉아있네'의 저자입니다. 홈·오피스 설치/관리 플랫폼 '쓱싹'을 운영하고 앉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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