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업무 분야를 막론하고 두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지향적 가치관', 그리고 '소통능력'입니다. 스타트업에 온 것 자체가 현재보다 미래를 보는 일이니, 일단 가치관은 대부분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은 알면 알수록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개성 강한 사람들이 모여있다가 보니 서로 중요히 여기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렵긴 해도 소통은 중요합니다. 업무환경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소수정예의 유기체적인 팀워크를 동력으로 전진하는 것이 스타트업이지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회의, 문서작업, 그리고 보고나 결재도 최소한으로 합니다. 수평적으로 협업하고, 궁금증이나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 자리에서 대화로 풀어나갑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소통능력이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컨택트》(Arrival)는 소통에 관한 영화입니다.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과 원작자 테드 창(Ted Chiang)은 소통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그 수단인 '언어'에 집중했습니다.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애덤스 분)의 직업도 언어학자입니다. "문명의 시작은 언어"라 믿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외계종족과 소통해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밝혀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외계종족은 그야말로 불쑥 찾아왔습니다. 12개의 '셸(shell, 외계종족이 타고 온 비행체·편집자 주)'은 세계 각지의 하늘에 떠서 지구인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셸의 문은 18시간에 한 번씩 열립니다. 그 안엔 발이 7개인 외계종족 '햅타포드(Heptapod)'가 있습니다. 여기까진 괜찮습니다. 셸은 그저 가만히 떠 있을 뿐 우릴 공격하거나 하진 않거든요. 문제는 이들과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지구에 와서 돌아가지 않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우리가 늘 그렇듯이요.
만약 영화처럼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이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루이스가 햅타포드에게 처음 건넨 대화는 '인간(HUMAN)'이라는 자기소개였습니다. 화이트보드에 이 단어를 써서 우리를 소개합니다. 이어 '루이스'와 '이안(제러미 레나 분)'이라는 각자의 이름을 써서 인사를 건네며 소통의 물꼬를 틉니다.
루이스는 매일 조금씩 외계 언어를 습득하게 됩니다. 이들의 언어는 전혀 달랐습니다. 햅타포드 문자는 선이 아닌 둥그런 원의 형태로 구성되어있고, 과거나 미래를 나타내는 시제가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소통이 된 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햅타포드와의 첫 대화 후 돌아오는 길에 "전 이제 잘리는 건가요?"라고 말했을 정도였지요. 루이스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소통 의지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방사능복을 벗고 맨몸으로 다가갔고, 손을 뻗어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결국, 유리 장벽 너머 그들의 공간으로 들어섰고, 비로소 상대를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햅타포드어를 알게 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깁니다. 햅타포드의 방식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에 기대고 있는데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가 쓰는 언어로부터 비롯된다"는 요지의 가설입니다. 알고 보니 햅타포드어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이 있는 언어였습니다. 이들에게 시간개념은 이들의 문자처럼 선이 아닌 원의 형태였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없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햅타포드는 이 능력을 전해주려고 지구에 온 것이었습니다. 3천 년 뒤 미래에 생길 일을 내다보고, 그때 역으로 인간의 도움을 받기 위한 초석이었습니다. 그렇게 루이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상대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니,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 영업사원 등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스타트업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떠해야만 하는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15화 《주토피아》에서의 비유처럼 스타트업 구성원들은 때로는 서로 다른 종족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업사원은 개발자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업할 때 필요한 간단한 기능 하나 추가해달라는 것뿐인데, 그것이 뭘 그렇게 힘들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개발자는 이미지의 몇 픽셀이 어긋났다고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온라인이 훨씬 큰 효율을 낼 것 같은데 왜 굳이 오프라인을 고집하는 것인지, 마케팅팀은 영업팀의 업무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 팀이지만 각각은 저마다의 언어와 문법을 갖고 있습니다. 사고방식과 중요히 여기는 가치도 서로 다르지요.
《컨택트》가 알려주는 '다른 종족과의 소통법'은 단순합니다. 먼저 '의지와 태도'가 중요했습니다. 상대방과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큰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루이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한 단어씩 알려주고 배우는 방식에 답답해하며 성과를 재촉하는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을 들여 차분히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이지요. 그러니 이게 가장 빠른 길이에요.
루이스는 먼저 자기방어(방사능복) 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상대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햅타포드가 손을 뻗으면 자신도 손을 맞대어 올리고,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정성껏 설명했습니다. 예컨대 '걷다(walk)'라는 단어를 화이트보드에 써놓고 직접 걷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소통에서 과정을 생략하거나 소홀히 하면 결국엔 오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상대의 사고방식을 알기 위해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개발에 관한 공부를 해본 적도 없이 듣기만 한 기획자와 최소한 HTML과 CSS 퍼블리싱을 공부해본 기획자는 이해의 수준이 다릅니다. 포토샵만 할 줄 알아도 개발자는 디자이너의 마음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자 전문분야는 다르지만 '유기체적인 팀워크'를 내기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를 조금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장면 세 개를 이어붙이면 재밌는 결과가 나오는데요. 첫 번째는 루이스가 햅타포드에게 지구에 온 목적을 묻는 장면입니다. 며칠간 대화를 나누면서 더듬더듬 대화가 가능한 시점에서 햅타포드는 "무기 제공(offer weapon)"이라고 답합니다. 두 번째는 딸아이가 "한쪽의 이익과 다른 쪽의 손실을 조율해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을 묻자 '논 제로섬 게임(non-zero sum game)'이라고 답하는 씬입니다. 마지막은 햅타포드를 공격하려는 중국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사별한 아내의 유언을 말해 멈추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엔 승자가 없다. 다만 과부만 있을 뿐이다(In war, there are no winners, only widows)"라는 내용이었지요.
세 장면을 합치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드러납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과 테드 창은 "소통은 논 제로섬 게임을 만드는 궁극의 무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영화 이미지 ⓒ Warner Bros.
*스타트업 관람가를 연재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네요. 스타트업도 잘 모르고 영화도 잘 모르면서 한 해 동안 연재를 했다니 신기합니다. 앞으로는 격주간 연재 합니다. 더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는 만큼 더 재밌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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