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뜻하는 영어 단어 'I'는 허리를 펴고 서 있습니다. 영어에서 고유한 것들은 이렇게 첫 글자를 곧게 표기하곤 하죠. 모든 나(I)는 세상에 하나뿐입니다. 대문자 'I'는 우리의 존엄성을 지지하는 단어입니다. 'you'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대문자로 표기되지 않을뿐더러, '너'도 'you'고 '너희'도 'you'입니다. 영어에서는 내가 아니면 다 'you'죠. 자존을 중요히 여기는 서양인의 가치관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제목에 'I'를 먼저 세웠습니다. 그리곤 쉼표를 붙여 독립성을 더했습니다. I라는 단어와 쉼표, 그 뒤 여백의 아주 짧은 기다림이 개인의 존엄을 더 곧게 세웁니다. 켄 로치 감독이 영화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가 그 속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모두 저마다 존엄한 'I'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려줍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곧은 사람입니다. 목수로 평생을 일하며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물고기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이지만, 바닷속 물고기가 그러하듯 자족합니다. 그는 사회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왔습니다. 가난 앞에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정의롭고 따뜻한 마음을 지켜온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의 심장에 무리가 옵니다. 병원에 실려 간 그에게 의사는 "자칫 죽을 수도 있다"면서, 당분간 일을 멈추고 약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는 휴직수당을 신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용 연금부에서는 그를 노동이 가능한 상태로 결정 내립니다.
수화기 너머 심사관은 기계처럼 매뉴얼을 읽습니다. 심장 지병이 있는 그에게 "팔을 어깨 위로 들 수 있어요?", "걸어 다닐 수 있나요?" 같은 엉뚱한 질문들을 늘어놓고서 그렇게 정해버립니다. 다니엘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면, 말을 자르고 "정해진 절차이니 예, 아니요로만 답해 달라"고 말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최소한 심장병과 관련된 질문을 해달라고 말하자 "이런 식이면 도와드릴 수 없다"고 답합니다.
휴식을 취해야 할 그는 결국 휴직수당을 받기 위해 항소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 배제된 시스템은 그의 심장을 조금씩 죽여갑니다. 관료들은 다니엘을 하나의 인격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매뉴얼에 따라 심사해야 할 '업무'로 대합니다. 길고 긴 통화연결음을 기다리며 듣게 된 이야기는 고작 "항소를 진행하려면 먼저 심사관의 통보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서면으로 통보를 받았는데도 절차가 그렇게 되어있으니 그래야 한다니.
답답한 마음에 관청을 찾아가 봅니다. 관료들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매뉴얼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원은 "심사관이 노동 가능한 상태라고 판정했으니, 구직수당이라도 받으려면 구직활동을 하고 증빙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에게 필요한 건 얼마간의 휴식과 그동안 생계를 이어갈 휴직수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 가능 판정을 받은 자'를 대하는 업무매뉴얼을 읊습니다.
항의를 하자 다니엘이 꾀병을 부려 수당을 받아내려는 사람인 것처럼 대합니다. "이런 식이면 도와드릴 수 없다." 대화의 끝은 늘 이런 협박이었습니다. 의무적인 절차라면서 '이력서 작성법 강의'에 다니엘의 이름을 올리고, 업무를 마무리합니다. 항소일이 정해지기까지 일단 구직수당이라도 받아야 하니 다니엘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런데 환장할 지경인 건 다니엘만이 아니었네요. 두 아이의 싱글맘 케이티는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원 제재 판정'을 받았습니다. 처음 이사 온 도시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길을 찾아오느라 지각했다고 설명해도 사무원은 안하무인입니다. 연민을 느낀 다니엘은 케이티를 도와줍니다.
대도시에서 밀려 떠내려온 케이티의 가난은 심각했습니다. 가진 돈을 털어 낡은 집을 겨우 구하고 나니 전기세를 낼 돈조차 없게 됐습니다. 아이들에게만 저녁을 먹이고 자신은 며칠째 사과 하나로 끼니를 때웁니다. 마트에서 처음으로 도둑질하다 붙잡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케이티가 훔친 물건은 생리대였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성을 잃은 시스템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담담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비인간성 속에서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 이뤄지는 그 순간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일깨워줍니다.
관료 시스템에 계속 시달리던 어느 순간, 다니엘은 짧은 심호흡을 하고서 허리를 펴 고쳐앉습니다. 그리고 항소를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관청 직원 앤은 그를 말립니다. 앤은 유일하게 그를 업무가 아닌 인격으로 대해주던 인물이었습니다.
항소를 포기하지 마세요. 전 다니엘 같은 경우를 전에도 봐왔어요. 선량한 사람들이 그렇게 거리에 나앉았어요. 항소를 포기하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어요.
다니엘은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다니엘은 그대로 관청을 나와 스프레이로 관청 벽에 이렇게 적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항소 날짜를 잡아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상담번호의 그 구린 통화연결음도 바꿔라.
예상외의 일입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또한, 상대방도 온전한 'I'라는 당연한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회 시스템은 우리가 'I'가 아니라 'they'나 'them', 혹은 수많은 '0' 중 하나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52,000,000명 가운데 하나이거나, 90,000명의 직원 가운데 하나, 그도 아니면 임의의 의료보험 숫자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시스템, 혹은 좋은 시스템을 망치는 잘못된 자들은 우리의 망각을 부추깁니다. 선량한 사람도 일상에 시달리다 보면 때때로 인간의 존엄성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0' 중 하나가 되는 걸 거부하기.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상당히 길고, 그러니 어떤 일을 하며 사느냐는 그 사람의 성향이나 가치관을 좌우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0'이 되길 거부하는 스타트업 구성원들은 'I'로서 살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참 다행입니다.
관청 벽에 스프레이를 뿌리던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억울하면 하다못해 벽에다 소리라도 치자. 그러다 보면 조금씩 세상이 바뀐다." 어느 정치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벽을 허물 수는 없지만, 최소한 벽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있습니다. 관객을 체할 것처럼 만드는 관료제 속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 사람이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모습들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보듬어줄 수 있는 건 결국 사람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I'입니다. 이 사실을 되새겨봅니다.
영화 이미지 ⓒ eOne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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