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33. 박쥐 – 직장인의 미장센
2016년 10월 14일

흰 벽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이따금 흔들립니다. 아마 창밖에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그 새하얀 벽에 문이 있습니다. 상현(송강호)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렇게 영화가 시작됩니다.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네요.

<박쥐>는 세 가지 색의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하얀 빛과 어둠의 검정으로 묘사된 이중성의 경계에 있는 건 물론 새빨간 욕망이겠습니다. 광기의 화가가 이중성이라는 주제를 놓고 온통 희고, 검고, 또 새빨갛게 칠한 유화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빛과 그림자의 얽힘을 지나, 다음 씬은 다시 검은 사제복의 사내가 다급한 걸음으로 흰 병원 복도를 거니는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이어 흰 옷을 입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 숨어 고해성사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고해성사는 이중성과 욕망을 고백하는 일이죠. 수녀는 다급한 자살 충동을 고백하고, 의사는 환자가 죽었으면 야근이 줄었을 것 같다며 아쉬워합니다. 마치 번갈아 바둑돌을 놓듯, 영화 초반부는 그렇게 흑과 백의 대국으로 짜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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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 뿐만은 아닙니다. 인물부터 소품까지, <박쥐>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저마다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새빨간 욕망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상현의 피리가 그렇죠. 신부로서의 상현은 피리를 들어 바흐의 ‘나는 만족하나이다(Ichabe genug)’를 연주합니다. 지친 환자들을 위해서였죠. 상현이 새빨간 피를 수혈받게 되며 욕망에 눈 뜨고 난 후에, 그 피리는 허벅지를 때리며 부푼 성기를 잠재우는 데 쓰입니다.

인물을 그리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때는 영화를 끌고 나가는 두 주인공, 상현과 태주(김옥빈)를 비출 때죠. 이중적인 정체성을 넘어, 두 사람의 태도나 성격을 묘사하는데도 밝음과 어두움이 반복됩니다. 먼저 피를 충분히 먹은 상황에서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쾌활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생기 가득한 얼굴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죠. 반면 피를 못 먹었을 때는 자괴감에 빠져 죽어버리려고 하거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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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한 이중성의 상징들이 영화를 그려나가는 동안, 그 사이에 욕망이 고입니다. 그러다 위태로운 줄다리기가 툭 끊어지는 순간, 일제히 솟구칩니다. 욕망이 분출되는 장소는 태주의 집입니다. 전통가요를 틀어놓고,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하는, 뭔가 싶은 이상한 공간이죠. 저마다의 욕망에 목마른 이들은 수요일마다 태주의 집으로 모이며 이 모임을 ‘오아시스’라고 부르네요. 재밌게도 오아시스가 처음 소개되는 장면에서 태주는 김밥을 말고 있습니다. 흑과 백 안에 다양한 재료들이 한데 말려 들어있는 음식이죠.

헛 이런… 이중성 얘기만 해도 지면을 다 써버리고 말겠네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직접 찾아보시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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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관람가 소재로 이 영화를 고른 건 ‘어떤 대립 사이에 고이는 그 새빨간 욕망’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라는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영화를 보면서도 그 욕망만큼은 무척 익숙했습니다. 새빨간, 강렬한. 나도 모르게 고여서는 어느 순간 난데없이 솟구치는. 그 욕망은 보편적이고,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우리도 아는 현실의 일이었습니다. 그건 밥벌이와 꿈 사이에서 문득 고개를 들이미는 ‘직장인의 미장센’에서도 볼 수 있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필시 ‘SBS스페셜 - 요즘 젊은 것들의 사표’라는 다큐멘터리를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사표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시간을 그냥 허비하고 있었다.
나는 소모되고 있었다.
내 삶을 살고 싶었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의 얼굴로, 혹은 잠깐 속았었다는 표정으로 이들은 “대기업에서 나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치관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고, 응원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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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많은 직장인의 하루에도 ‘이중성의 미장센’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에는 밝아보이는 현실과 막연해서 깜깜해보이는 회사 밖의 미래가 있고, 그 사이에 욕망이 있습니다. 현실과 꿈의 팽팽한 줄다리기 그 가운데 고여서 문득문득 파문을 일으키는 어떤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빨갛고 강렬한 욕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을 걸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나도 꿈을 품고 살고 싶다.
회사를 위해 소모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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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 욕망이 견딜 수 없이 커졌음을 깨닫게 된다면, 혹은 회사에 피를 빨려 창백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제는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하는 일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충분한 기간을 두고, 일상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묵묵히 입을 닫고 해소되지 않는 그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반복되는 갈등과 풀리지 않는 욕망 때문에 삶이 더 고달파지거든요.

영화 이미지 출처: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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