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경제(起業家經濟)’가 필요하다
2016년 10월 27일

‘헬조선’이라는 말로 ― 여러 이유로 정말 싫어하는 단어지만 ― 뭉뚱그려 표현되는, 우리 국민을 힘들게 하는 문제점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개인의 ‘삶의 질’이 말도 못할 정도로 훼손당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삶의 질이 그리 희생되어야만 하는 이유의 중심에는, 정작 개인의 소득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가 있을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2 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추석을 지내면서 경험했던 치솟은 물가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암울한 것은, 그처럼 삶의 질을 희생시킨 채 그냥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앞으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학자나 경영학자가 정의하는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물가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량 사이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수준으로 ‘스스로’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스스로’ 효과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이 동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내수 시장 규모가 매우 제한적이지만 시장 내부의 가치사슬이 대부분 ― 그것이 대기업이든 아니면 중소기업이든 ― 기존의 기업들에 의해 형성되고 결정되며, 오늘날에는 그 구조가 매우 완고한 상태로 고착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그처럼 고착화되고 포화된 우리나라의 가치사슬을 점유한 ‘기업’이라는 장치의 숙명이 단지 많은 매출을 올리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지속해서 매출을 증대시켜야만 한다는 점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때 주지해야 할 것은 기업이 단지 부의 창출을 넘어 지속해서 성장하려는 관성이 결코 비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의 성장은 기업을 구성하는 임직원은 물론 주주와 기업의 활동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해법은 기업이 지속해서 기존의 성과를 개선하여 성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와 같은 성장을 창출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기업은 물론 계속해서 신사업의 형태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혹은 국외 시장 진출 등 기존에 보유한 시장 규모의 확대를 통해 성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제한적인 국내 시장의 특성은 결과적으로 각종 산업의 규모를 제한하고, 결국 그 산업이 쉽게 포화되도록 만든다. 이는 기업이 국내 시장 내에서 신사업 분야에 진출하려고 하여도 그처럼 다각화를 추진할 수 있는 규모의 기업이 진출할만한 규모의 시장이라면 이미 다른 기업에 의해 선점되거나 포화된 상태일 가능성이 큼을 의미한다.

아울러, 국내 시장의 제한적 규모는, 많은 경우 기업이 기존에 보유한 역량(capability)의 규모에도 영향을 미친다. 달리 말해 국내 기업은 국내의 제한적 시장 여건에 효과적이고 효율적이 될만한 규모로 생산 역량을 맞춰서 보유한다는 의미다. 기업의 역량(capability)이 시장의 규모에 따라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스케일링(scaling)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이미 우위를 점하는 내수 시장을 넘어 국내 기업이 국외 시장에 진출할 때 그 시장 내부의 기존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처럼 신사업 진출, 혹은 시장 규모의 확장이 쉽지 않은 경우라면, 기업은 주어진 시장 내에서 실적을 개선하는 차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와 같은 실적의 개선은 ― 소폭의 제품 개선을 포함한 ― ‘가격의 인상’이나 경쟁자의 ― 인수·합병(M&A)을 포함한 ― ‘퇴출’을 통해 시장 내 점유율을 증대시키고 ― 프로세스 혁신과 같은 ― ‘생산 효율화’ 등을 통해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이뤄질 것이다.

이처럼 제한된 시장에서의 실적 개선은 ― 이미 완고하게 형성된 시장 구조를 선점했으나 신사업이나 신시장 개척에 대한 여지는 별로 갖고 있지 못한 ― 대부분의 국내 기업에 오히려 옳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 이미 비정상적으로 완고한 ― 국내 시장의 구조상 실적의 개선을 통한 성장의 모색은 결과적으로 그 소비자, 즉 우리들의 ‘삶의 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는 ‘돈의 가치’가 얼마나 하락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임금과 물가 증가율 사이의 괴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나 커졌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우리 정부가 기치로 내건 ‘창조경제’라는 패러다임의 수립 초기, 여러 정부 기관에 자문을 제공했다. 당시 ‘창조경제’의 방향성은 국내 기업의 성장 여력이 한계에 이르렀고 그들만의 성장으로는 국가 성장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기존 기업들이 ‘추격자(follower)’ 전략 대신 ‘시장 선도자(first mover)’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 그리고 스타트업을 필두로 한 혁신적 신규 기업의 등장 및 시장 진입을 유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것에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창조경제’를 두고 여러 이견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게 된 지금도 다양한 경로로 ‘창조경제’ 체제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전략과 정책, 사업에 연관되어, 운용 과정의 불합리와 때로는 부조리한 면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필자는 ‘창조경제’는 옳은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앞으로도 지속해서 우리나라 전반의 방향성을 주도해 나아가야할 화두라고 믿는다. 기업의 전략적 방향성 전환에 대한 기존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새로운 혁신적 기업들이 맹렬히 등장해야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헬조선’, 즉 삶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을 혁파할 수 있고, 그것이 우리 미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삶을 실제로 좌우하는 장치들인 기업과 시장의 구조는 이미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져서 핵심 사업을 중심으로 기업 집단의 해체에 가까운 집중적인 구조조정 없이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기업 구조의 조정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필요한, 혹은 원하는 수준으로 구조조정이 빠르게 이루어지면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충격을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기업이 가치사슬을 형성하고 점유한 곳이 아닌, 그들의 조직 규모로는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장을 창출하는, 새로운 혁신적 기업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을 ‘기업가경제(起業家經濟, entrepreneurial economy)’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때 '기업가'는 기존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인 기업가(企業家)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기업을 일으키는 ‘기업가(起業家)’를 의미한다.

‘기업가’들이 만들어내야 하는 시장은 기존 기업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규모의 시작점에서 출발한, 그러나 몇 년 안에 엄청난 규모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시장이다. 그런 ‘기업가’들은 ― 기존의 기업들이 “그래 그건 너의 시장이야”라고 말할 만큼 절대 순진하지 않으므로 ― 기존의 기업가들이 결코 모방할 수 없는 무기들을 매우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처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시장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 그 가능성을 실제 시장으로 전환하는 일, 그리고 엄청난 자금력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력을 가진 기존 기업들로부터 그와 같은 시장을 지켜내는 일, 이 모두를 하나의 연장선 위에 놓고 보면 가능성은 0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구 위에 살면서 실제로 우리 머리 위를 태양이 지나가는 것을 경험하는, 즉 인식과 사실이 크게 상충하는 것이다.

‘관측의 이론적재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학자에 따라서 ‘관측의 이론의존성’으로 사용하기도 함)’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인식이 선입견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이론이 형성되며, 이렇게 형성된 이론은 더 나아가 관측에 사용되는 도구까지 지배하게 됨으로써 더욱더 이론에 부합하는 관측만을 유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음에도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류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 즉 현상(appearance)이 항상 실재(reality)를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잘못된 인식이 혁파되지 않는다면 결국 더욱 고착화되어 갈 수 있다는, 관측의 이론적재성의 한계 및 그로부터 기인하는 위험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기업가경제’, 즉 기존에 기업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의 틀 안에서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공략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고 실제로 도전해 성취를 이룬 ‘기업가’들의 위상이 제고되는 방향으로 사회의 틀을 재편하는 것이 실제로도 우리가 인식하는 것만큼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기회가 없는 것처럼 ‘인식’되었어도 선입견에서 탈피해 얼마든지 기회를 인식하고 또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Rabbit-Duck (토끼-오리), 관점에 따라 토끼로도, 오리로도 보인다

Rabbit-Duck (토끼-오리), 관점에 따라 토끼로도, 오리로도 보인다

특히 여러 이유로 과도하게 대형화된 기업들을 중심으로 경제가 구성되고, 그들에 의해 거의 모든 제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당신의 마진이 곧 나의 기회다(Your margin is my opportunity.)”라는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Jeff Bezos)의 말을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나라처럼 인구의 밀집도가 높은, 그래서 시장이 지리적으로 밀집됐지만 공급자의 수가 제한적인 시장에서는 그만큼 ‘기업가’들이 쉽게 시장을 파악하고 혁신을 보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기업가정신’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戰後)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1960년대에 우리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이들이 바로 ‘기업가(起業家)’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오늘날 그들이 가졌던 기업가정신(起業家精神)이 사회 전반에서 희미해진 것은 역설적이고 또 비극적이다.

혁명을 뜻하는 단어인 ‘revolution’의 어원이 ‘다시 돌아가다’라는 의미의 ‘revolve’임을 생각하자. 이제 우리 안에 내재된 ‘기업가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국가의 위상이라는 대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에게 내재한 ‘기업가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인식의 개정(epistemic iteration), 즉 혁명적 인식의 개정(revolutionary epistemic iteration)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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