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70. 지금 정체기라 느낀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2017년 12월 08일

박하사탕 ⓒ 신도필름

나 다시 돌아갈래, 설경구가 돌아왔다

기차가 달립니다. 영호는 선로 위에 서 있습니다. 다급히 경적을 울리지만 물러나지 않습니다. 돌진하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영호는 말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박하사탕>(2000, 김영호 역)의 시간을 거꾸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기라도 한 걸까요. 설경구가 돌아왔습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한재호 역)과 <살인자의 기억법>(2017, 김병수 역)의 설경구는 더이상 강철중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어떤 이전의 설경구도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설경구였습니다. '아 참, 우리나라 영화계에 설경구라는 명배우가 있었지.' 두 영화를 본 2017년의 관객은 그렇게 설경구를 다시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계에 설경구만큼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송강호 정도가 있을까요. 설경구는 선언이라도 하듯 2000년 1월 1일 <박하사탕>으로 영화계에 나타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미 연극무대에서 전무후무한 1천 회 공연 기록(지하철 1호선)을 세운 바 있던 그였기에 영화계는 설경구의 자리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계는 설경구의 무대였습니다.

<공공의 적>(2002, 강철중 역)의 강철중은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캐릭터 중 하나가 됐습니다. 경찰들 사이에서 "강철중은 경찰보다 더 경찰 같더라"는 평을 들으며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의 주연과 대상을 싹쓸이합니다. 2000년부터 3년간 4개의 신인남우상과 10개의 남우주연상을 쓸어 담습니다. 시상식장에서 "죄송하다"고 수상소감을 말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다음 해엔 <실미도>(2003, 강인찬 역)로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배우로 등극했습니다. <광복절특사>(2002, 유재필 역) 같은 코미디와 <역도산>(2004, 역도산 역) 같은 일본어 연기까지, 정극 코미디 멜로 액션 할 것 없이 다양한 영화의 다양한 연기를 다 압도적으로 잘 해냅니다.

공공의적 ⓒ 시네마서비스

설경구를 극복한 설경구

그런 설경구에게도 정체기가 옵니다. 연기 자체는 여전히 훌륭했습니다. 배우로서의 노력도 한결같았습니다. 다만 설경구라는 배우의 색이 너무 짙은 게 문제였습니다. 어떤 역을 해도 '설경구가 연기하는 누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자기 색이 선명한 배우였고 동시에 늘 지독히 노력하는 완벽주의자였던 탓인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의 노력을 통해 자기 안으로부터 구축한 캐릭터로 연기하는 그였기에 결과물이 크게 다르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대중적 인기를 가져다준 공공의 적 강철중이라는 캐릭터가 역으로 대중에게 피로감을 주었던 게 컸습니다. <공공의 적 2>(2005)와 <강철중: 공공의 적 1-1>(2008)이라는 선택은 지금 돌아보면 패착이었습니다. 이후 <용서는 없다>(2009, 강민호 역), <감시자들>(2013, 황반장 역) 등 여러 작품을 내놓았지만, 관객이 본 건 언제나 '그 설경구'였습니다.

방심하고 있는 우릴 깜짝 놀라게 한 건 <불한당>의 한재호였습니다. 핏이 세련된 쓰리피스 수트를 차려입고 포마드로 말끔히 머리를 올려 넘긴 한 설경구는 무려, 섹시했습니다. 설경구와 임시완의 블랙핑크빛 브로맨스라니.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2~30대 젊은 여성 팬들은 이 '섹시한 중년배우'를 '꾸'나 '설탕'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팬레터와 선물 조공을 보냅니다. 팬카페가 다시 열리고, 촬영장에 밥차가 옵니다. 급기야 아이돌이나 오르는 강남역 광고 스크린에 그의 사진이 걸립니다. (경구는 멍도 참 예쁘게 든다...) 갑작스러운 팬덤에 설경구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역시나 기쁘고 감사해 합니다. 매번 팬카페와 디시인사이드 설경구갤러리에 직접 들어가 인증샷과 함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고 합니다. 한 인터뷰에선 팬이 선물한 티셔츠를 입고 와 "요즘 주변 사람들이 고목나무에 꽃 폈다고 놀린다"고 말했다 합니다. 설경구는 지금 연기 인생 2막을 열었습니다.

불한당 ⓒ CJ엔터테인먼트

정체기라 느낀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10년이 넘는 침체기 동안 설경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쩌면 스스로도 혹시 나의 재능이 여기까지인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마치 자신을 벌하듯, 침체기 동안 여러 영화에서 육체를 혹사한 건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기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테니까요. 설경구가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빛을 본 이유는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다 내려놓고서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불한당>과 <살인자의 기억법>에 관한 인터뷰들을 보면 설경구가 늘 말하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매너리즘', '안 해본 연기',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걱정', '모험을 했다' 등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살인자의 기억법> 때부터였어요. 임하는 자세부터 달랐어요. 내가 뭔가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 텀이 있더라도 '변화에 대한 노력을 내가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었어요. 내가 뭔가 더 고민하지 않으면 이 정글 같은 곳에서 살아남지 못하겠다, 나만 정체되겠다 생각이 든 거죠.-뉴스엔 인터뷰 中 

불한당은 <살인자의 기억법> 촬영이 끝나고 나서 바뀐 마음가짐으로 만난 첫 영화예요. 감독님, 스태프 다 젊고 패기 넘치는 현장이었죠.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제게 엄청난 자극을 줬어요. 이 나이에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배우로서 계속 새롭고 싶어요. 그래서 <박하사탕>이나 <공공의 적>처럼 관객들이 계속 기억해주는 캐릭터를 매 작품 남기겠다는 욕심이 있어요. 다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싱글리스트 인터뷰 中 

어쩌면 자기 한계를 규정짓는 건 자기 자신뿐일 수 있습니다. 한계란 건 애초에 없는 걸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롭게 공부하면 새로운 아웃풋은 반드시 나오게 마련입니다.

스타트업을 하면서도 매일 주어진 일만 반복하면 필연적으로 정체기가 옵니다. 번아웃과 함께 오는 2~3년 차에 특히 그렇죠. 스타트업 구성원의 성장 속도가 빠른 건 더 효율이 좋은 일, 더 재밌는 일을 스스로 찾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지금 정체기라 느낀다면 이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더 재밌는 일, 아직 안 해본 일에 도전해보세요. 2막이 열릴지 모릅니다.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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