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54. 히든 피겨스 –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
2017년 04월 28일

정성껏 차린 상을 맛있게 먹고 난 기분이었습니다.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는 대부분 관객이 보고 나면 기분 좋아질 영화입니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습니다. 연출이나 각본부터 음악이나 의상 모든 게 딱히 흠잡을 구석 없이 매끄럽고요. 만약 다각형 다이어그램을 그려본다면 모든 항목에서 고르게 중상위 점수를 받아 예쁜 도형을 만들 것 같습니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입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먼저 우주로 올라가려고 앞다투던 우주개척의 시대였습니다. 동시에 흑인이나 여성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때였습니다. 나사에서 일하는 세 흑인 여성 캐서린, 도로시, 메리는 이 시대의 가운데 서 있습니다. 셋 모두 빛나는 지성의 소유자였지만 별관 구석에서 허드렛일을 합니다. 이들은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직 컴퓨터라는 물건이 없던 이 시절엔 'compute(계산하다)'라는 단어의 인칭 명사로서 컴퓨터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시간 걸리는 단순계산업무만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죠.

어딜 가도 ‘COLORED(유색인종 전용)’ 표시가 붙어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불평등과 불합리가 삶 일부였습니다. 노력, 실력, 지구력보다 나면서 정해진 피부색이 중요한 사회였으니까요. 흑인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백인이 정했습니다. 극 중에서 메리는 “백인들은 우리가 승리하려고 할 때마다 매번 결승선을 옮긴다”고 말하는데요. 이 시대 흑인의 삶이란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해 불합리한 결승선을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히든 피겨스>의 성숙한 인물들은 이 치기 어린 시대를 참아냅니다. 결국, 러시아보다 먼저 유인(有人) 로켓을 쏘아 올리는 일에 핵심 역할을 하며 멋지게 승리합니다.

약자를 누르는 출발선의 불평등

영화를 볼 땐 그저 인종차별 만연한 60년대의 얘기로 여겼습니다. 며칠 후 아침에 세수하다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영화 속 그토록 띄우고자 했던 로켓을 기어이 짓누르던 그 중력처럼, 출발선의 불평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종의 사회적 중력으로서 약자의 어깨를 누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영화가 관객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보고 싶은 이야기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히든 피겨스>는 우리 이야기였습니다. 실화 바탕의 드라마인 동시에, 지금도 유효한 그 불평등에 대한 우화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자연스레 사회적 중력 아래 서는 고단함을 알게 됩니다. 사업을 하면 더 빨리 알아차립니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어려움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 좋은 대학을 지나 배경을 등에 업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잘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나도 어렵게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은 수긍되지 않습니다. 대출받아서 가족의 병원비를 보태고 자꾸 밀리는 공과금을 내본 적이 없다면 말이죠. 이들은 출발선의 불평등이 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화에서 엔지니어를 꿈꾸는 메리는 벽에 부딪힙니다. 엔지니어로 지원하려면 백인들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규정을 발견한 후였습니다. 그런데도 기어이 꿈을 좇으려는 그에게 동료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묻습니다. “네가 백인 남자였어도 엔지니어를 꿈꿨을까?” 메리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죠. 벌써 됐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출발선은 불평등합니다. 사회는 늘 그래왔습니다. 누군가는 0m에서 출발하고, 다른 누군가는 80m 앞에서 시작합니다. 만약 모두의 출발선이 같았다면 현실도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지금 성공한 사람 누군가는 사실 별 볼 일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까불지 말고 겸손해야겠습니다. 지금 실패한 사람 누군가는 무엇보다 운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괜히 쫄지 말고 당당해야겠습니다.

용기있는 약자는 결국 모두 팀이다

아득히 멀리서부터 달려와야 했던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은 기어이 백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기어 코는 앞지르죠. 이 승리는 이들 모두의 승리였습니다. 캐서린이 나사에 갈 수 있던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캐서린의 재능을 안 흑인학교 선생님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어 캐서린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IBM이 들어서는 걸 보고 시대의 변화를 직감한 도로시는 개발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흑인 여성들을 모아놓고 그 지식을 나눕니다. 누구 하나라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됐든 나서서 도와줍니다. 도로시의 대사 중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

불평등이 여전하듯, 약자(underdog)의 승리공식 역시 여전합니다. 우리는 팀으로서 승리합니다. 어쩌면 용기 있는 약자들은 결국엔 모두가 한 팀입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사회적 소수집단의 유대감이나, 더 나아가 공동체라는 느낌마저 드는 이유는 결국엔 모두가 한 팀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상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또 상처를 겪어본 사람만이 상처를 알아보고 연민할 수 있는 것처럼요. 약자의 시선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약자들의 도약. 정치든 사회든 시장이든 아니면 예술이든, 돌아보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꾼 주역은 늘 이거였습니다. 출발선의 위치로 삶의 모든 결과가 정해진다면 세상은 끔찍하기만 할 것 같네요.

서로의 존재로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용기 있는 약자들, 사회적 중력을 거스르고 로켓을 띄우고자 하는 분들 모두가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이미지 ⓒ 20th Century 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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