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41. 인택토 – 우리 스타트업의 운을 시험해볼까?
2016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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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에 웬 사람들이 모여 달리고 있습니다. 빽빽이 나무가 우거진 숲속입니다. 사람들은 두꺼운 천으로 눈을 가리고, 양손을 등 뒤에 묶은 채 무방비로 돌진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누군가 나무에 얼굴을 박고 튕겨 나뒹굽니다. 전력으로 달리던 속도의 힘까지 고스란히 돌아와 코뼈가 박살이 났습니다. 차례차례 둔탁한 타격음이, 어김없이 뒤따르는 비명이 서늘한 숲의 공기 속에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이 중의 소수는 마치 텅 빈 운동장을 달리듯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큰 나무들이 야무지게 우거진 숲이 분명한데 이들은 나무에 옷깃도 스치지 않습니다.

영화 《인택토》의 한 장면입니다. 강렬한 스페인 영화입니다. 신인 감독의 저예산 데뷔작이고, 사실 연출이나 촬영 등 다른 부분에서는 특출나달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은 오로지 이야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행운은 실력입니다. 수학이나 농구를 아주 잘하는 것처럼 타고나는 재능이자, 남의 몫을 빼앗는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운이 더 강한 사람이 운이 약한 사람을 만지거나 사진을 찍으면 상대방의 행운을 흡수하게 됩니다. 숲속을 내달린 행위는 이들이 행운을 겨루는 도박 경기의 하나였습니다. 《인택토》는 이렇게 타고난 천운으로 승부를 가리는 도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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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절대 강자는 카지노를 운영하는 노인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30년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나치 수용소에서 혼자만 살아나왔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천운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적수는 또 다른 천운의 소유자 토마스입니다. 토마스는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억만분의 1의 확률로 혼자 살아남은 인물입니다.

이 도박사들의 승부는 아찔합니다. 눈을 가린 채 차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한밤의 8차선 고속도로를 가로지르거나, 리볼버의 6개 총알 슬롯 중에 한 개만 비워놓고 다니는 러시안룰렛 같은 것들로 대결을 벌입니다. 베팅도 일반 도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단 현금은 걸 수 없습니다. 저택, 세계적인 명화, 최고급 스포츠카 같은 것들을 걸고 게임에 참가합니다. 물론 행운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이 모든 걸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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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겨루는 승부라니. 흥미로운 설정이죠. 흔히들 "운도 실력이다"라거나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요. 스타트업의 성공에서도 운은 어쨌거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걸 부정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실 스타트업의 성장에도 많은 것들에 운이 따라줘야 합니다. 우선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부터가 큰 운입니다. 꽤 오랫동안 함께 일해보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동업자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아이템 선택이나 사업운영에도 운이 필요합니다. 어떤 서비스는 갑자기 바뀐 시장환경이나 정부정책과 맞물려 급성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엔 불운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망하는 회사들이 있지만, 이재용이 바르는 바람에 뜬금없이 매출이 수직상승 하는 립밤 제조업체도 있습니다.

자기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건 약 오르는 일이죠. 그런데 길게 보면 운이라는 건 비교적 공정한 요소인 것도 같습니다. '모두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만큼은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사회엔 출발선 자체가 너무 달라서 아예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이도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교적 공정'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은 다음에 어떤 걸 잡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영화 대사처럼, 우리의 박스 어딘가에 행운은 있습니다. 결국, 그걸 잡느냐 못 잡느냐로 승부가 갈리곤 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운을 잡을 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활용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착실히 키워왔는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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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한 사실은 운이라는 게 어떤 형태로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때론 좀 짓궂은 형태로 찾아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당시엔 그게 행운이라는 걸 전혀 모르게끔 말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왓츠앱의 공동창업자 브라이언 액톤과 얀 코움은 2007년에 페이스북에 입사지원서를 넣은 적이 있습니다. 둘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트위터에도 다시 함께 지원서를 냈고, 또 둘 다 떨어졌습니다. 가고 싶은 회사들에 모두 취업을 실패한 이들은 왓츠앱을 창업합니다. 몇 년 후 왓츠앱은 20조 원을 받고 자신들을 탈락시킨 그 페이스북에 인수됩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액톤과 코움이 페이스북 취직에 실패한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습니다.

다른 사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는 파산 직전에 후다닥 만든 게임입니다. 직원들 월급 줄 돈도 없어서 감원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촉박해 기존 게임과는 다른,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형태로 만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때 아이폰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앵그리버드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자원 부족에서 비롯된 단순한 게임 형태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됩니다.

▽ 2009년 페이스북 면접에서 떨어진 후 액톤이 트위터에 올린 글

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진이 자동 삭제되는 어떤 익명 커뮤니케이션 앱은 난감한 문제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음란성 사진을 공유하는 십 대들이 예상외로 너무 많아져서 골머리를 썩이게 된 것입니다. 이 앱은 스냅챗이 되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사실 해외 사례까지 갈 필요도 없겠습니다. 국내에도 성공한 많은 사업가들에겐 운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걸 운이 '따랐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야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행운의 시기나 크기가 저마다 다르긴 했을지언정, 이들 모두 그때까지 열심히 생존하며 기회를 기다렸고, 마침내 운이 왔을 때는 그걸 제대로 활용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운을 '쟁취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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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택토》의 인물들은 자신의 운을 믿고 무방비 상태로 내달렸습니다. 혹은 운이라는 실력을 맹신하고 실패하면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리스크에 자신을 걸었습니다. 결말은 좋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죽고, 뼈가 부러지고, 파산했습니다.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이 장면들을 곱씹어보다 보면서 마치 "운을 바라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를 들은 것은 느낌이었습니다. 멋지게 리스크에 모든 걸 걸지 말고, 폼은 안 나도 리스크를 줄이는 일을 먼저 하라는 얘기인 것 같았습니다. (흑, 저는 역시 진지충입니다.)

모든 창업자가 손정의나 마윈 같은 승부사가 되어야만 사업에 성공하는 건 분명히 아닌 것 같습니다. 투박하더라도 먼저 지속 가능한 구조부터 만드는 편이 더 성공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배우고 착실히 실력을 키워나가다 보면, 즉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면 문득 운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행운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온 우주가 나서서 찾아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올 때가 되면 오겠죠. 그때까지는 운을 바라는 일은 잊어버리고 불운에 대비하는 편이 아마도 맞겠다고 진지교훈충은 오늘도 영화를 보며 생각해봅니다.

영화 이미지 © Lions Gate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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